인천 근대화 거리 문화탐방 후기
박종호
스페인어과 85
일시 : 2026년 6월 7일(일) 15~21시
참석 : 중어74 현상윤, 베어76 이성우, 영어76 임성락, 베어77 엄태경, 경제78 임창수, 노어80 이두헌, 정외80 김종찬, 한교80 박찬호, 아랍어81 남기창, 서어82 유영초, 불어83 성종경, 서어83 김복남(과 배우자), 법학84 남일, 포어84 김경은, 법학85 함칠성, 서어85 박종호, 아랍어85 장은영, 영어86 임은영, 정외86 이희환, 서어87 정동하, 터키어89 정석원, 행정95 남선우 [23명]
집결지인 인천역에 도착하니, 역사(驛舍)가 꽤 낡았고 광장과 주변 거리도 아주 소박했다.
널찍하고 사람 많고 현대적인 건물이 들어선 수원역을 떠올리며 갔는데, 예상이 완전 어긋난 것.
철도 종점이라서 그런 것 같은데, 현재 동인천역 주변을 포함해 재개발이 진행되고 있는 것 같긴 했다.
날씨가 좀 흐려서 덥지 않아 좋은 일요일 오후, 인천역 광장에 모여 해설자 김경은 동문의 간단한 사전 설명을 듣고 인천역 뒤 제8부두에서 제1부두 쪽으로 이어지는 해안 도로를 따라 탐방에 나섰다. 탐방 경로는 당시 일본 조계지를 거쳐 자유공원에 오른 뒤 차이나타운으로 내려오는 것.
가장 먼저 들른 곳은 우선(郵船)주식회사 인천지점 건물.
1888년에 건립돼 현재 인천 최고(最古)의 근대 건축물이라고 한다. 개항기 조선의 해운업을 독점했고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때는 병력과 군수물자도 운반했다고 한다.
다음은 자유공원으로 오르는 길목의 청·일 조계지 경계의 석조 계단.
특이하게도 계단 양쪽에 4~5개씩 있는 석등의 모양이 달랐는데, 왼쪽은 청국, 오른쪽은 일본 양식이라고 한다.
(조계지(租界地)란 개항 도시의 외국인 거주지로서 당사국이 행정권과 경찰권을 행사하는 지역인데, 조선은 1884년 영·미·청·일과 계약을 체결했다.)
그 아래쪽 일본 조계지 초입의 대불호텔 전시관은 1887년에 건립됐으나 1899년 경인선이 부설되면서 경영난으로 매각돼 중국음식점(중화루)으로 운영되다 1978년에 헐렸는데, 최근 복원해 ‘대불호텔 전시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호텔 앞길이 일본 조계지의 본정통 또는 금융거리로 불렸는데, 몇 걸음 더 가면 제1은행(현 개항박물관)이 나온다. 1883년 출장소로 출발해 1899년 지점으로 승격. (本町通(혼마치)는 일제 강점기 최대 번화가였던 충무로의 명칭)
조금 더 가면 제18은행(현 근대건축전시관)과 제58은행(현 한국외식업중앙회 인천중구지부), 미두취인소 터(현 주차장)가 거의 나란히 붙어 있다.
이들 모두 우선주식회사와 마찬가지로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 착취 기관들로, 군대(무력)과 경제(자본)이 분리될 수 없음을 실증하는 건물들이다.
미두취인소(米豆取引所)란 쌀·콩 등 곡물에 대한 선물거래소인데, 투기로 이어질 수 있는 거래 방식에 익숙했던 일본인들이 이에 미숙한 조선인들을 유인해 자본을 빨아먹었던 곳이다.
미두시장은 조선의 미곡을 일본으로 대규모로 신속하게 송출하기 위한 미곡유통기구였는데, 중일전쟁 이후 전시계획경제를 시행하면서 1939년 폐쇄되고 총독부 산하 조선미곡시장주식회사가 전시 미곡 유통을 대행했다고 한다.
이어 우리는 미두취인소의 창고가 있던 자리로 발길을 옮겼다. 그런데 이곳엔 주변에 건설될 오션시티 아파트 홍보관이 떡하니 버티고 있어서 아무 감흥이 없었고, 다만 김경은 동문의 다음 설명이 기억에 남는다.
일제 강점기의 소설가 이상(김해경)의 소설 「지주회시(鼅鼄會豕)」(1936)는 곡물 투기꾼인 소위 미두쟁이를 다룬 소설인데, 제목이 특이한바 지주는 거미를 뜻하므로 거미가 돼지를 만났다는 뜻이다.
술집 다니는 아내를 등쳐먹고 사는 주인공이 친구의 꾐으로 아내를 보증인으로 세워 빌린 돈을 말아먹는다는 이야기인데, 이곳 미두취인소 사무실에 다니는 친구를 방문하는 장면이 나온다는 것이다.
구 인천우체국 사거리를 지나면서 김경은 작가의 또 다른 소설 이야기가 이어진다.
일제 강점기 진보적 사실주의 작가로 알려진 강경애 「인간문제」(1934)의 한 대목. 지식인 신철이 불야성을 이룬 자본주의 거리를 건너다 보면서 절망한 곳이 바로 우체국 앞이라는 것이다.
소설의 줄거리는 주인공 신철이 ‘서울로 가는 관문이요 바다를 낀 문제적 공간’ 인천으로 노동운동을 하러 오긴 했으나 문제는 노동 자체의 고단함에 부딪쳤다는 점. 제1부두에서 일용 노동자로 일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건너편 휘황한 거리의 화려한 금파 카페를 바라보며 주저앉아 눈물 흘리는 장면. 결국 그는 노동운동을 포기하고 안락한 삶으로 돌아간다는 것.
작가 이상의 무력감과 신철의 유약함을 일면은 이해하면서 이제 우리 일행은 오르막길로 접어든다.
선광미술관(당시 닛센(日鮮)해운 사옥. 현재 인천의 유일한 4층짜리 근대건축물)을 가볍게 지나쳐 인천 감옥에 두 번이나 수감된 연고로 조성된 ‘김구 거리’의 김구 선생 모자 동상 앞에서 단체 사진을 찍고 성공회 내동교회에 잠시 들렀다. 이곳은 1890년 설립된 한국 최초의 성공회 성당이나, 원 건물은 한국전쟁 시 파괴됐고 현 건물은 1956년에 지어진 것이라고 한다.
(내동교회뿐만 아니라 오례당, 알렌 별장, 존스톤 별장, 세창양행 사택 등 귀중한 근대 문화재들이 인천상륙작전 당시 인천 전역을 쑥대밭으로 만든 마구잡이 포격에 거의 모두 파괴됐다. 문화역사적 관점에서도 인류의 소중한 유산을 파괴하는 전쟁은 결코 일어나선 안 된다.)
홍예문(1908)은 당시 일본 조계지와 인천의 중심부 만석동을 연결하려고 뚫은 터널인데, 다리 위에서 모 선배 왈 “언젠가 어떤 남자가 이곳에서 자살하려고 뛰어내렸는데 아래를 지나던 어떤 여자를 덮치는 바람에 여자는 죽고 남자는 도망갔다.”고 한다. 무슨 의도로 이런 말씀을 했는지는 모르겠으나 별 쓸모, 감동, 교훈은 없었다. ㅋ
자유공원에 들어서니 휴식객들이 곳곳에 꽤 많았고, 저만치 문제의 맥아더 동상도 보였다.
1888년 조성된 한국 최초의 서구식 공원으로, 각국공원(1888) – 서공원(야마테공원)(1914) – 자유공원(1919) – 만국공원(1945) – 자유공원(1957)으로 이름도 참 여러 번 바뀌었다고 한다.
그래서, 20여 년 전 맥아더 동상 철거 운동이 거세게 벌어졌던 것을 기억하는 우리 문화탐방단은 저무는 해를 바라보며 문화 탐방의 의미를 폭증하고자 야간 기습 철거를 잠시 모의하는 패기도 보였으나, 일단 허기부터 채워야 뭐든 할 수 있을 테니 제물포 구락부 따위엔 눈길도 안 주고 차이나 타운으로 터덜터덜 걸어 내려갔다.
유명 중국음식점에서 식사 및 반주 후 역시 유명한 인천맥주로 발길을 옮겼는데, 현관을 들어서면 우측으로는 통유리 안쪽에 수제맥주 제조시설이 있고 정면에는 주문 키오스크가 있고 좌측으로는 2층 가는 계단이 있다.
생전 처음 마신 에일 맥주도 맛이 괜찮네 하면서도 내심 찜찜했던 것은 맥아더 동상 문제였다. 그러나, 소수의 과격하고 선도적인 행동보다는 다수의 대중과 함께하는 행동이 느리고 부족해도 훨씬 값진 것이니 오늘은 맥주나 실컷 마시자는 결론이 어렵사리 도출됐다. 정말이다.
이날 탐방은 우리 동문들로 하여금 반제국주의 결의를 새삼 다지는 계기가 됐을 것이다. 인천 근대화 거리의 유산들은 소위 ‘식민지 근대화’의 기념물이 아니라 반제·반전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가시적 증거물이기 때문이다.
한편, 관련 소설들의 내용을 결합한 김경은 동문의 해설이 ‘인문학적 문화 탐방’이란 어떤 것인지 잘 보여주는 바람에 참석자들이 “인천 근대화 거리 문화탐방 한 번 더!”를 외치게 만들었으니, 책임지셔야 한다. (시간이 넉넉지 않아 청국 조계지, 월미도공원, 팔미도 등대 등 못 가본 곳도 많았다.)
산문집 [지붕 위를 달리는 버스](김경은 지음)를 보면서 배경이 된 인천으로 달려가고 싶은 마음이 절로 들었습니다. 작가께서 다시 문화탐방 행사를 마련해주신다면, 만사 제치고 참여하겠습니다.
[지붕 위로 달리는 버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