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보아도, 우리는
— 〈1980 사북〉 서대문공동체상영회
최재직
스페인어과 95
🌊 다음 주야
“남일 선배님, 영화관에 아무도 없어요!” 전화기에다 소리쳤다.
〈1980 사북〉 특별상영회, 3월 23일 월요일 저녁 7시에 한다고 외민동 단톡방에서 분명 봤는데 말이다. 선배님도 소리쳤다. “다음 주야.” 상영일은 오늘 23일 월요일이 아니라 다음 주 30일 월요일! 늦을까 봐 헐레벌떡 같이 뛰어갔던 아내에게 “4월 6일 월요일에 온 게 아닌 게 어디야, 그치?” 안 해도 될 말을 했다.
3월 30일, 갈지 좀 망설였다. 다큐멘터리가 다큐멘터리지, 사북을 몰랐던 미안함에 가 본다고 한 거지 별 기대를 하지 않았던 건 사실이다. But, ‘노쇼’로 외민동에 누가 될 수는 없다! 아내랑 다시 갔다. 로비에 사람들이 많았다. 200석 규모로 보이는 상영관이 거의 다 찼다. 우리 자리는 맨 앞줄 맨 오른쪽, ‘목이 좀 아프겠는 걸’ 궁시렁거리며 앉았다. 주최 측의 간단한 인사 뒤 영화가 시작되고, 와…
영화가 끝나고 아내에게 “오늘 안 왔으면 후회할 뻔했다.” 평소 잘 쓰지 않는 말을 했다(안 왔는데 어찌 후회를 할 수 있단 말인가). 상영 시간 2시간 10분, 좀 길다 싶기도 했지만 허튼 장면들이 없었다. 영화 마치고 화장실 간 몇 명 빼고는 아무도 바로 일어나지 않았다.
박봉남 감독님은 영화에 담지 못한 이야기들이 많다고 했다. 짧은 GV(감독과 대화) 시간이 아쉬웠다. 무엇보다 〈1980 사북〉은 감정이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아서 놀라웠다. 가족과 친구들, 외민동분들, 동네분들과 같이 보고 싶어졌다. 감독님께 꾸벅 인사를 드리고 명함을 받았고 다음 날 바로 전화를 드렸다.
🌊 40석을 채워라
“감독님, 영화 다시 보고 싶어요!”
감독님은 앞으로 있을 여러 상영회 일정을 알려주셨지만 GV가 없거나 그 시간이 짧다면서 연희동에 있는 예술영화전용관 ‘라이카시네마’를 추천하셨다. 사운드가 특히 좋아 젊은이들한테 인기가 많은 곳이라고 하셨다.
알아보니 시간당 대관료는 20만 원, 영화 보고 1시간 정도 GV를 하려면 세 시간은 빌려야 하니 ‘좋다, 60만 원, 내가 (일단) 낸다!’ 각오하였으나 “최재직 샘께서 40명을 모아주시면 대관료는 저희 시민상영위원회에서 먼저 지불하겠습니다. 괜찮으시다면 오시는 분들께 참가비 또는 후원금으로 1만 원씩 모아 주실 수 있을까요? 차액이 발생해도 괜찮습니다. 많은 분들이 영화를 보고 사건의 진실을 아는 게 중요해서요.”라고 감독님이 말씀하셔서 얼마나 다행이었던지. 감독님이 직접 오시니 거마비를 생각하지 않을 수는 없어서 조심스레 여쭤보니, 필요 없다고 하셨다.
김복남 부회장님과 함께 준비한 서대문공동체상영회 날짜는 4월 30일로 정해졌다. 이제 제일 중요한 건 호객 행위! 가족, 동네분들, 번역협동조합 조합원, 외민동, 친구 등 같이 보고 싶은 많은 분들에게 톡하고 전화하고 만나서 직접 얘기했다. 한 분이 그랬다. “비용이 총 60만 원인데, 1만 원씩 다 걷어도 40만 원… 더 받아야 하지 않나요?” 그분은 혼자 온다는데 3만 원을 바로 보내주셨다. 입금 알람이 톡톡톡 울렸다. 1만 원, 2만 원, 5만 원, 10만 원!!! 어떤 분은 둘이 온다면서 6만 원을 보내주셨다. 왜 6만 원인지 아직도 궁금하다.
상영일 9일 전인 4월 21일 기준 마흔세 분이 74만 원을 모아주셨다. 이 중 네 분은 오지 않고 후원만 하신다고. 사람을 모으고 회비를 미리 받는 사이, 감독님은 극장과 다시 이야기를 잘 하셔서 40석×9,000원, 1시간 GV 대관료 10만 원, 총비용을 46만 원으로 낮춰 놓으셨다. 74만 원, 〈1980 사북〉 공식 후원계좌(정선지역사회연구소)로 보내드렸다. 송금 사진을 찍어서 오지 않고 후원만 하신 네 분께 보내드렸다. 조금이나마 보탤 기회를 줘서 고맙다고, 너무 뿌듯하고 기쁘다고 되려 내가 칭찬을 받았다. 감독님께도 사진을 보여드렸는데 ‘감동입니다! 서대문 상영회 무척 기대됩니다!’라고 하셨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일은, 한 명을 더 꼬셔서 40석을 꽉 채워 감독님을 감동시켜 드리는 것!
🌊 제 자리를 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상영일이 다가오자 사람들이 한두 명씩 빠지기 시작했다. 빠지면 그만큼 후다닥 채웠다. 김복남 부회장님과 동네분들이 적극 나서서 빠지면 채우고 또 빠지면 또 채웠다.
영화 상영 하루 전인 4월 29일 기준 딱 한 명이 모자랐다. 사람들 모으는 데 진이 조금 빠진 것도 사실. ‘신께선 나에게 39명까지만 허락하시나 보다!’ 마음을 비우고 더 연락하지 않기로 마음먹은 오후, 낯선 번호로 전화가 왔다. “내일 자리가 있나요?” 전혀 모르는 분이었다. 〈1980 사북〉 공식 홈페이지에 올라가 있는 서대문 상영회 일정을 보고 연락을 한 것이다! 오 신이시여! “뻥 아니고 정말로 딱 한 자리가 남았습니다. 내일 꼭 뵙겠습니다! 고맙습니다!” 하고 전화를 끊자마자 또 모르는 번호가 떴다.
이번에도 자리가 있냐고 묻는다. 방금 마지막 퍼즐이 끼워진 건데, 진~작에 마감이 되었다고 죄송하다고 했다. “당일 오시지 못하는 분들이 계시지 않을까요?” 그분은 물러서지 않는다. 여러 번 확인해서 그럴 가능성이 낮다고 대답했다. 사실이다. 오신다는 분들께 세 번 정도 확인했거든. 전화한 사람은 정선지역사회연구소 황인욱 소장님이었다. 영화에도 나오시는 분이다. 경향신문 논설위원이 곧 자기를 인터뷰하려고 오는데, 영화를 보고 오는 게 낫고 그래서 가장 빠른 상영 일정을 확인해 보니 서대문이라서 전화하신 거다. 벌떡 일어나 전화기에다 소리쳤다. “제 자리를 드리겠습니다!”
그날 저녁 또 한 분이 문의하셨다. 아내에게 양해를 구하고 아내의 자리를 드리기로 했다. 40석 영화관, 간이 의자를 두거나 계단에 앉는 건 소방법 때문에 불가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다시 보고 싶어 이 상영회를 준비했지만 괜찮다. ‘많은 분들이 영화를 보고 사건의 진실을 아는 게 중요’하니까. 그날 밤, 두 분이 또 빠지셨다. (앗싸)
드디어 4월 30일! 여러 급박한 사정으로 다섯 분이 못 오셨다. (괜찮다.) 제 시간에 영화는 시작되었고 2시간 10분 동안 툭툭 터지는 관객들의 낮은 탄식, 울음소리. 다시 보니 다시 보이는 게 있었다. 새벽까지 감독님과 기울인 술잔들. 이날은 감정이 좀 치우친 것 같다.
🎉 탄가루만 한 도움이라도
그날 딱 한 분이 급한 일이 생겨 영화 마치자마자 일어났다. 후배의 친구다. 후배는 영화 보고 친구랑 나눌 이야기가 많았는데 그러지 못해서 메모했다가 친구에게 보낸 메시지를 내게도 보여주었다.
“1980년 사북의 일을 나는 몰랐어.
대학에 들어간 뒤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사북 탄광촌에서 큰 노동항쟁이 있었다는 말을 얼핏 주워들었던 기억이 있는 정도야. 나는 1986년부터 5년 정도 고한, 함백, 정선 등지에서 살았어. 아버지는 탄광 광부였고 우리 가족도 사택촌에서 살았어. 영화에서 ‘그래도 고한은 사북보다 (환경이) 나았다’고 하던데 그 말이 사실인지, 우리 4인 가족이 지내던 사택은 축사 정도는 아니었어. 아냐, 현실은 축사였지만 내 기억이 미화된 건지도 몰라. 그전까지 외할머니네서 1년, 친할머니네서 1년 하는 식으로 얹혀살다가 처음으로 독립한 보금자리라 엄마도 나도 신이 났던 기억이 나거든. 단칸방은 좁고 부엌은 더 좁고 담장이 없긴 했지. 그래도 좋았다. 그러고 보니 동네에 구멍가게가 있던 기억이 없더라. 그 동네도 조합에서 생필품을 팔았던 걸까. 탄광촌에서는 2년을 다 못 채우고 나왔어. 아주 갑작스럽게 이사하게 됐는데 대체 왜였을까? 어려서 아무 기억도 안 나. 다만 그때 그 마을엔 왠지 젊은 남자들의 열기 같은 게 들뜨게 흘러다녔던 걸로 기억해.
대학교에서 노동운동사를 배울 때 나는 그때 내 아버지도 1987년 항쟁과 실낱 같은 연관이라도 있으면 좋겠다 생각했었어. 그러면 명예로운 아버지를 가질 수 있을 것 같았나 봐. (아마도 그런 일은 없었겠지만.) 근데 어제 영화에 나온 노동자들과 그 가족들의 삶이 얼마나 처절했는지 보니 내가 얼마나 무지한 채로 ‘투사’의 가족이 되길 꿈꾸었나 싶어. 너무 무서웠어.
처음 봤어. 갱도가 얼마나 무섭고 긴지. 내 아버지가 거기서 어떤 일을 했는지. 그게 얼마나 고된 노동인지. 매일 저녁 무겁고 까매진 몸으로 집으로 들어서던 광부들에게 어린 자식은 힘이 되었을지, 짐이 되었을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집에 갔다.”
후배의 허락을 받고 박봉남 감독님께 보여드렸다. “이런 인연이 있군요… 생각보다 광산에서 자란 사람들이 주변에 많더라구요. 놀라고 있습니다.” 황인욱 소장님께도 보여드렸다. “귀한 글 보내주셔서 고맙습니다. 후배분도 80년대 고한에서 살았던 분이라고 하니 더 반갑네요. 저와 몇몇 분들이 오마이뉴스에 〈늦은 메아리〉 시리즈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그 지면에 이 글을 어떻게든 살려 보고 싶네요. 허락을 받아주시면 제가 좀 더 여쭤보고 글을 더 보완해 보거나 일부라도 인용해서 싣고 싶습니다.” 후배는, “탄가루만 한 도움이라도 된다면 기쁘겠습니다!”라고 했다.
오래 보아도 우리는 서로를 잘 모른다.
〈1980 사북〉, 후배를 조금 더 알게 해준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