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을 믿습니다"

— 추모와 공연, 혼돈과 감동 사이에서 보낸 광주의 시간

Picture of 김민수

김민수

중국어과 89

5.18을 맞아 광주에 간다는 것.

금남로에서, 도청에서, 무덤에서 그날을 느끼고 제대로 추모하는 일. 광주 유족들과 기일을 함께하는 일. 조용한 분노를 지피는 불씨를 얻는 일.

자타공인 MBTI 극 J인 나는 광주 기행을 결정한 날부터 머릿속으로 다큐멘터리 한 편을 만들었다. 이미 광주에 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동선을 따라 그곳에 선 내 모습을 그리고, 다른 목적으로 방문해 급하게 지나치곤 한 풍경을 이번에야말로 가슴으로 느끼고 사진으로도 담으려 했다. 느낌을 글로 풀어내는 고통을 알기에 기행문 같은 건 남기지 않으리라 결심했다. 속에 눌러 두더라도 언젠가 어떤 형태로든 밖으로 나올 테니까.

계획은 여지없이 무너졌다. 또 이렇게 글을 쓰게 되었다.

실은 J도 안다. 세상일이란 게 계획대로 돌아가기 어렵다는 것을. 그래서 J는 반드시 플랜 B를 만들어 둔다. 글쓰기를 위해 메모하는 수고만 더 하면 된다. 작은 수첩을 챙겼다. 플랜 B도 깨졌다. 느닷없이 뒤풀이 문화제 노래 공연에 함께하게 됐다.

입만 벙긋거릴 예정이었다

글도 공연도 ‘편하게’ 하라고 하지만, 내게는 둘 다 무겁다.

딱 하루, 종일이 아니라 오후 몇 시간만 허락된 연습. 거기다 한 번도 불러본 적 없거나 모르는 노래. 어찌어찌 곡을 익히고 연습하러 모이고 보니 절망적이었다.

노래하는 사람이 달랑 넷이다. 넷이라고 해서 못 할 건 없지만 내가 껴 있다는 게 문제였다. 그 옛날, 음악엔 기웃거리고 싶은데 노래를 못해서 노래를 만들기 시작한 나다. 애초에 인원을 더 모을 예정이며 합창에다 작은 소리만 보태면 된다는 얘길 듣고 합류하기로 했다.

입만 벙긋거릴 작정이었다.

그걸 철석같이 믿었다가 돌아가며 독창까지 하게 됐다. 다행히 나만 제외하곤 다들 가수였다. 주어진 조건에서 이것저것 포기하다 보니, 윤경준 단장이 꿈꾸던 장엄한 무대는 간데없고 앙상한 뼈대만 남았다. 그냥 뒤풀이에서 스피커를 타고 나오는 노래. ‘공연의 질’을 포기해야 한다는 점이 연희자로선 적잖이 뼈아팠지만, 우리는 서로를 격려하며 열성적으로 합을 맞췄다. 연습 장소를 내주고 곁에서 연신 박수를 쳐 준 선배, 격려차 방문해 뒤풀이라며 온갖 산해진미를 맛보게 해 준 선배들 덕에 책임감도 부담감도 까맣게 잊은 채 사람들과 웃고 떠드는 기억만 남았다. 술자리에선 혁명인들 못 하랴. 노래단 이름까지 만들었다나.

다음 날, 술에서 깬 노래 공연 팀에겐 다시 현실이 닥쳤다. 혁명을 하느라 실무 논의를 잊었다. 자질구레한 준비는 그렇다 치고, 음향과 반주를 시작으로 음향 설치나 리허설 일정마저 불확실했다. 연줄을 동원해 반주를 만들고, 오길준 선배의 협찬을 받아 괜찮은 음향을 빌리고, 그제야 악보가 오가고, 공연팀 단톡방은 바빴다. 독창으로 내야 하는 힘겨운 음 하나부터 걱정이었던 나는 잠도 오지 않았다.

하여튼 자포자기했다. 노래 공연만 제발, 가사나 틀리지 않고 얼른 마쳤으면. 민주 열사 묘역에 가기 전까지 줄곧 그런 심정이었다. 내가 해설하기로 한 김철수 열사의 무덤을 겨우 찾아 그 앞에 서기 직전까지만 해도.

무덤 앞에서

김철수 열사는 고등학교 3학년 때 분신하고 보름 동안 사경을 헤매다가 세상을 떠났다. 많은 분 중에 열사를 고른 것은 그가 남긴 유언 때문이었다.

“여러분을 믿습니다.”

글로 읽을 때부터 울컥했는데, 무덤 앞에서 유언을 입 밖으로 내다가 말을 제대로 맺지 못했다. 흑백 사진과 눈이 마주쳤다.

어느 공연에서, 세월호에서 희생된 아이들의 초상이 뜰 때부터 눈물이 나오는 바람에 고개를 숙이고 공연을 못 본 적이 있다. 책을 쓰려고 답사 여행을 갈 때마다 인물들이 묻혔을 땅을 밟았다가 눈물이 나와서 오랫동안 자리를 뜨지 못하곤 했다. 그 느낌이 치밀었다. 꾹꾹 내리누르고 삼켰다. 일행들 덕이다. 나 혼자 갔더라면, 내가 흙 속에 홀로 누워 있는 듯이 슬픔에 파묻혀 헤어 나오기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연달아 나타나는 사진들은 또 어떻게 마주한단 말인가. 함께 추모하는 사람들은 존재 자체만으로도 힘이었다. 무덤 속 영령에게 이제 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기억뿐이다. 많은 사람이 기억한다는 것, 그러면 영령도 덜 외롭지 않을까. 뭔지 모를 마음의 짐이 조금은 덜어지는 느낌이다.

문득, 뼛가루가 되어 항아리 속에 담긴 엄마와 얼마 전 세상을 뜬 윤경이까지 떠올랐으니 확실히 그렇다.

🌊 산다는 게, 이런 일이 불쑥

현실이란, 때로는 실연의 아픔도 흐지부지 만들 정도로 강력할 수 있다. 그렇다. 공연이 남았다. 행진하며 구호를 외칠 때는 목을 아끼라며 서로에게 신호하고, 밥때나 차량 사정을 따져 가며 작전을 짜고, 공연 후에 닥칠 자괴감을 미리 느껴 충격을 완화시키고.

결론은 이렇다. 공연을 전격 취소했다.

무대에서 우당탕 마이크 리허설은 했다. 그때까지도 돌아가며 가사를 틀렸지만, 의외로 들어줄 만했다. 걱정이 조금은 안도로 바뀔 즈음에 민원이 들어왔다. 밤늦은 시각에 시끄럽다고 군청에서까지 연락이 왔으니 철수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산다는 게, 이런 뜻밖의 일이 불쑥 끼어들어서 짜릿하다. 공연 체험은 해봤겠다, 스피커를 통해 나가는 목소리가 생각보다 괜찮다는 사실에 만족하기로 했다. 그 와중에도 윤경준 단장은 외민동 노래패 결성이라는 원대한 포부를 포기하지 않았으니, 그걸로 됐다. 아쉬우니까 따로 공연하자는 누군가의 제안은 뜯어말렸다.

뒤늦게 주변이 보인다. 발밑을 밝히려고 곳곳에 놓아둔 낮은 등, 접시에 담긴 홍어, 돼지 수육, 김치, 그 외 갖가지 도구들. 목록만으로도 끝이 없고 여행 짐을 싸고 풀 때 제일 성가신 물건들. 이 모두를 빠짐없이 챙기느라 뒤에서 애쓴 사람들. 버스에서 김밥을 먹을 때부터 알았어야 한다.

오랜 방콕 생활로 체력이 떨어지지만 않았더라면 밤새워 떠들었을지도 모른다. 술은 못해도 안주는 좋아하는 덕에 술자리에서 끝까지 버티는 게 내 특기였다. 자러 들어가는 중에 “김 작가!” 하고 부르는 소리에 돌아봤을 때, 손을 덥석 잡으며 활짝 웃던 선배. 만난 지 30년이 넘었다. 학교 다닐 땐 특별히 친하지도 않았는데, 우리는 뭐가 그리 반갑고 기뻤을까. 그런 감동의 순간이 생기는 곳. 미리 근육이완제를 2알이나 챙겨 먹은 J가 하필 이어달리기 주자가 되어 버리는, 그런 예기치 못한 일이 날마다 일어나는 곳.

🎉 외민동 만세.

답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