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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피디의 문화산책] 화성인이 내려온 밤, 아나운서가 안 온 아침

작성자
한피디
작성일
2026-10-30 07:59
조회
18
1938년 CBS 라디오 스튜디오의 오슨 웰스
ON AIR
한피디의 문화산책 · 열한 번째 시간
화성인이 내려온 밤,
아나운서가 안 온 아침
글·선곡 한피디

한피디의 문화산책은 대학 시절 FBS 방송국 마이크 앞의 감성으로 떠나는 문화 산책입니다. 그림 한 점, 노래 한 곡, 책 한 권에 담긴 사람과 시대 이야기를 나눕니다. 가끔은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도 곁들입니다. 신청곡과 사연은 댓글로 보내 주세요.

한피디의 문화산책, 열한 번째 시간입니다. 며칠 무거운 이야기를 이어 왔으니 오늘은 숨 좀 돌리겠습니다. 오늘은 방송 이야기입니다. 88년 전 가을 미국을 뒤집어 놓았다는 라디오 방송, 그리고 41년 전 가을 외대 방송국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첫 곡은 퀸의 〈라디오 가가(Radio Ga Ga)〉입니다. 어릴 적 라디오만 끼고 살던 시절을 그리워하는 노래입니다.

♪ 오프닝 곡
〈Radio Ga Ga〉 (1984)
퀸

"화성인이 뉴저지에 내렸습니다"

1938년 가을 어느 일요일 밤, 미국 CBS 라디오. 잔잔한 음악이 흐르다가 갑자기 "속보입니다"라는 목소리가 끼어듭니다. 화성에서 이상한 폭발이 관측됐다, 뉴저지 시골 마을에 무언가 떨어졌다, 거기서 괴물이 나와 사람들을 공격하고 있다.

스물세 살 연출가 오슨 웰스가 H.G. 웰스의 소설 『우주전쟁』을 뉴스 속보처럼 꾸며 만든 라디오 드라마였습니다. 방송 처음과 중간에 "이건 드라마입니다"라는 안내도 나갔습니다.

다음 날 신문: "온 미국이 공포에 빠졌다"

다음 날 아침 신문들은 난리가 났습니다. 뉴욕타임스는 "라디오 청취자들 공황, 전쟁 드라마를 사실로 믿어", 데일리뉴스는 "가짜 라디오 전쟁, 미국 전역에 공포"라고 1면에 큼지막하게 실었습니다. 집을 버리고 달아난 사람, 병원에 실려 간 사람이 있었다는 기사도 쏟아졌습니다. 웰스는 기자들 앞에 불려 나와 해명해야 했습니다. 2년 뒤에는 한 대학교수가 "100만 명이 겁에 질렸다"는 연구까지 내놓았습니다.

방송 다음 날 기자들 앞에 선 오슨 웰스

방송 다음 날 기자들 앞에서 해명하는 오슨 웰스, 1938년 (퍼블릭 도메인)

그런데 진짜 겁먹은 건 누구였을까

세월이 흐른 뒤 학자들이 다시 따져 봤습니다. 그날 밤 청취율 조사에서 그 방송을 듣고 있던 집은 5천 가구 가운데 2% 정도였습니다. 대부분은 다른 채널의 인기 프로그램을 듣고 있었습니다. 병원에 실려 갔다는 이야기도 확인해 보니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그럼 신문은 왜 그렇게 부풀렸을까요. 그때 신문은 광고를 새로 나온 라디오에 빼앗기고 있었습니다. "라디오는 믿을 수 없다"는 이야기가 신문에는 반가운 이야기였습니다. 결국 가장 큰 가짜 뉴스는 라디오 드라마가 아니라, 그 드라마를 두고 쓴 신문 기사였던 셈입니다. 가짜 뉴스에 대한 가짜 뉴스였습니다.

1985년 가을, 외대 방송국

저도 방송 사고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대학교 1학년 2학기, 외대 방송국 FBS에서 '아침의 산책'이라는 프로그램을 맡고 있었습니다. 아침 8시 반부터 9시까지 나가는 방송이었고 PD가 저였습니다. 지금 이 '문화산책'이라는 이름도 거기서 왔습니다.

그날 8시 반이 됐는데 아나운서가 오지 않았습니다. 이대로면 방송을 펑크 내야 할 판이었습니다.

방송국은 보통 이렇게 돌아갑니다. 아나운서는 스튜디오 안에서 원고를 읽고, PD와 기술 담당은 유리창 밖 믹서기 앞에서 음악을 틀고, 소리를 맞추고, 아나운서에게 손짓으로 신호를 줍니다.

저는 급하게 마이크를 하나 들고 와서 믹서기 채널 하나에 꽂았습니다. 그리고 음악을 틀고, 좋지도 않은 목소리로 직접 멘트를 했습니다. 한두 곡쯤 나갔을 때 아나운서가 헐레벌떡 뛰어 들어왔고, 방송은 그렇게 무사히 끝났습니다.

그날 아침 교정에서 방송을 듣던 학생들 가운데, PD가 마이크를 잡았다는 걸 눈치챈 사람이 있었을까요.

얼굴 없는 목소리를 믿는다는 것

라디오에는 얼굴이 없습니다. 듣는 사람은 목소리만 듣고 믿습니다. 1938년 오슨 웰스는 그 믿음으로 드라마를 만들었고, 신문은 그 소동을 부풀려 라디오를 깎아내렸습니다.

지금은 그 일이 훨씬 쉬워졌습니다. AI는 누구의 목소리든, 누구의 얼굴이든 만들어 냅니다. 유튜브에는 오늘도 빨간 글씨로 '속보'를 단 영상이 넘쳐납니다. 화성인보다 그럴듯한 가짜가 손바닥 안으로 날아듭니다.

한피디의 생각

가짜보다 무서운 건 가짜를 부풀리는 쪽입니다. 1938년 신문처럼, 소동을 키워서 이득을 보는 사람이 누구인지 물어야 합니다.

믿기 전에 세 가지만 묻습시다. 누가 말했나, 언제 말했나, 다른 데서도 그렇게 말하나. 이 세 가지만 확인해도 대부분의 가짜는 걸러집니다.

그래도 방송은 사람이 합니다. 펑크 날 뻔한 그날 아침 방송을 살린 건 기계가 아니었습니다. 마이크를 잡은 PD와 숨차게 뛰어 들어온 아나운서였습니다. 가짜가 넘치는 세상일수록, 믿을 만한 목소리는 결국 사람이 지켜야 합니다.

마지막 곡은 신나게 갑니다. 버글스의 〈비디오가 라디오 스타를 죽였다(Video Killed the Radio Star)〉입니다. 1979년에 나온 이 노래는 1981년 미국 음악 방송 MTV가 문을 열면서 맨 처음 내보낸 뮤직비디오였습니다. 텔레비전이 라디오를 밀어낸다는 노래였지만, 보시다시피 라디오는 죽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아직도 방송 흉내를 내며 글을 쓰는 사람도 있으니까요.

한피디의 문화산책,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여러분 기억 속 라디오 한 장면은 무엇인가요? 댓글로 들려주세요.

♪ 클로징 곡
〈Video Killed the Radio Star〉 (1979)
버글스

사진: 1938년 CBS 라디오 스튜디오의 오슨 웰스, 방송 다음 날 기자회견 · 위키미디어 공용(퍼블릭 도메인)

참고: Freethink 'The War of the Worlds panic was anti-radio propaganda', 메인대 마이클 소콜로 교수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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