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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피디의 문화산책] 맞으며 쓴 자술서, 40년째 남은 벽

작성자
한피디
작성일
2026-10-28 08:01
조회
9
건국대 10.28 기림비 앞 건대항쟁 기념식
ON AIR
한피디의 문화산책 · 아홉 번째 시간
맞으며 쓴 자술서,
40년째 남은 벽
글·선곡 한피디

한피디의 문화산책은 대학 시절 FBS 방송국 마이크 앞의 감성으로 떠나는 문화 산책입니다. 그림 한 점, 노래 한 곡, 책 한 권에 담긴 사람과 시대 이야기를 나눕니다. 가끔은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도 곁들입니다. 신청곡과 사연은 댓글로 보내 주세요.

한피디의 문화산책, 아홉 번째 시간입니다. 오늘은 건대항쟁이 일어난 지 꼭 40년 되는 날입니다. 건국대에서 학생들이 3박 4일 동안 버틴 이야기는 많이들 아십니다. 오늘은 그다음 이야기, 경찰서에서 보낸 또 다른 3박 4일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첫 곡은 노래를 찾는 사람들의 〈그날이 오면〉입니다.

♪ 오프닝 곡
〈그날이 오면〉
노래를 찾는 사람들

아시안게임 끝나고 23일 뒤

1986년 가을, 서울에서는 아시안게임이 열렸습니다. 9월 20일에 시작해서 10월 5일에 끝났습니다. 텔레비전에서는 날마다 금메달 소식이 나왔습니다.

그리고 23일 뒤인 10월 28일, 건국대에 경찰 2,700명쯤이 밀고 들어왔습니다. 전국 대학생 연합 모임을 만들려고 모인 학생 1,500명쯤이 건물 다섯 곳에 갇혔습니다. 31일 아침 8시, 경찰은 '황소30'이라는 작전으로 건물을 쳐들어갔습니다. 그날 1,500명쯤이 잡혀가고, 1,200명쯤이 구속돼서 수사를 받았습니다. 한 사건으로 이렇게 많이 잡아 가둔 건 우리 역사에서 처음이었습니다.

그런데 더 험한 일은 그 뒤에 벌어졌습니다. 문이 닫힌 방 안에서요.

형사 둘, 3박 4일

경찰서 조사실에서 3박 4일 동안 형사 두 명이 번갈아 가며 저를 때렸습니다. 원하는 건 딱 하나였습니다. 미리 써 놓은 자술서에 제 이름으로 사인하라는 거였습니다.

거기 적힌 죄는 이랬습니다. 국가보안법 위반, 불을 질렀다는 방화, 일하는 경찰을 막아서 다치게 했다는 죄, 그리고 집시법 위반.

스무 살 대학생을 나라를 뒤엎으려는 빨갱이로, 불 지른 사람으로, 경찰을 다치게 한 사람으로 만드는 데 증거는 필요 없었습니다. 주먹과 시간, 그리고 사인 한 번이면 됐습니다. 맞으면서 제가 털어놓은 건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그 사람들이 미리 써 놓은 문장이었습니다.

저 혼자 겪은 일이 아닙니다. 올해 4월, 그날 건국대에 있었던 20개 대학 365명이 진실화해위원회에 "그때 일을 밝혀 달라"고 신청했습니다. 다들 비슷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끌려가면서 맞고, 조사받으면서 맞았다. 40년 동안 악몽을 꿨다. 전과 기록 때문에 취직도 못 했다.

지난해 5월 진실화해위원회는 "그때 법에서 정한 시간을 넘겨서 학생들을 가둬 놓았다"고 인정했습니다. 그 넘긴 시간이 바로 우리가 조사실에서 맞던 시간이었습니다.

다른 나라는 어떻게 했나

그 무렵 다른 나라에서도 정부가 사람을 가두고, 때리고, 죽였습니다. 그런데 그다음이 우리와 달랐습니다.

아르헨티나는 건대항쟁 바로 1년 전인 1985년, 군사정권의 우두머리들을 일반 법정에 세웠습니다. 검사는 마지막 말을 "다시는 안 된다"로 끝냈습니다. 군사정권 1인자 두 명은 죽을 때까지 감옥에 있으라는 판결을 받았습니다. 몇 년 뒤 대통령이 풀어 줬지만, 2006년에 재판이 다시 열렸습니다. 지금까지 군인 1천 명 넘게 죄를 받았습니다. 이 이야기는 영화 〈아르헨티나, 1985〉로도 나왔습니다.

칠레에서는 1973년 군인들이 정권을 뒤엎은 다음 날, 가수 빅토르 하라가 경기장에 끌려가 고문을 받고 총에 맞아 죽었습니다. 기타 치던 손가락은 짓이겨져 있었습니다. 50년이 지난 2023년, 칠레 대법원은 이제 70~80대 할아버지가 된 군인 7명에게 감옥에 가라고 했습니다. 그 경기장은 지금 '빅토르 하라 경기장'이라고 불립니다.

독일은 살인죄에 시효가 없습니다. 아무리 오래돼도 죄를 물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2022년, 나치 수용소에서 열여덟 살 때 비서로 일했던 97살 할머니가 사람을 죽이는 일을 도왔다는 죄로 판결을 받았습니다. 77년이 지났어도, 직접 총을 쏘지 않았어도 책임은 남는다는 겁니다.

대만은 2018년, 독재 시절 억울하게 죄를 뒤집어쓴 사람 5천 명 넘게 판결을 한꺼번에 없앴습니다. 나라가 씌운 죄를 나라가 직접 벗겨 준 겁니다.

물론 다른 길을 간 나라도 있습니다. 남아공은 "다 털어놓으면 벌은 안 준다"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스페인은 1977년에 법을 만들어 독재 시절 일을 아예 덮어 버렸고, 그래서 지금도 재판을 못 합니다.

우리는 중간에 멈췄습니다

우리도 한 번은 해냈습니다. 1995년 5·18특별법을 만들어 전두환과 노태우를 법정에 세웠습니다. 전두환은 평생 감옥에 있으라는 판결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1997년 12월, 나라가 두 사람을 풀어 줬습니다. 아르헨티나도 똑같이 풀어 줬지만 다시 재판을 열었습니다. 우리는 거기서 멈췄습니다.

멈춘 값은 비쌌습니다. 2024년 12월 3일 밤, 계엄 포고령에 "영장 없이 잡아 가두고 뒤질 수 있다"는 문장이 또 들어갔습니다. 1986년 조사실에서 벌어진 일이 38년 만에 나라의 공식 문서로 돌아온 겁니다. 국가폭력은 지나간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벽 하나는 넘었습니다

지난 8월, 5·18 피해자 보상법을 고친 법이 국회를 통과했고 9월에 공포됐습니다. 이제 5·18 피해자는 정신적으로 입은 피해를 나라에 물어 달라고 할 때 기한이 없습니다. 전에는 피해를 안 날부터 3년이 지나면 소송도 못 냈습니다.

이 법이 국회를 통과하던 날, 저는 그 소식을 한참 붙들고 있었습니다. 그 몇 달이 어땠는지는 따로 적지 않겠습니다.

그런데 이 문은 아직 5·18 피해자에게만 열렸습니다. 건대 조사실에서 맞은 사람들, 다른 고문실과 수사실을 거친 사람들은 여전히 기한에 막혀 있습니다. 그래서 올해 4월 국회에 나온 법안이 중요합니다. 공무원이 사건을 꾸미거나 감춘 죄에도 기한을 없애고, 지난 일에도 적용하자는 법입니다. 5·18에서 연 문을 모든 국가폭력 피해자에게 열자는 겁니다.

10.28 건대항쟁 40주년 행사 안내

10.28 건대항쟁 40주년 행사 안내

한피디의 생각

나라가 저지른 폭력에는 기한이 없어야 합니다. 아르헨티나는 장군을, 칠레는 50년 전 군인을, 독일은 97살 할머니까지 법정에 세웠습니다. 우리는 그 조사실 형사 두 명의 이름도 모릅니다.

"너무 오래 가둬 놨다"에서 끝나면 안 됩니다. 그 방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누가 자술서를 미리 써 놨는지까지 밝혀야 합니다. 맞아서 쓴 자술서로 씌운 죄는 나라가 직접 지워야 합니다.

풀어 준다고 끝나지 않았습니다. 1997년에 풀어 준 결과가 2024년 포고령으로 돌아왔습니다. 이번에는 끝까지 가야 합니다. 그때 스무 살이던 사람들이 이제 곧 예순입니다. 살아 있을 때 답을 들어야 합니다.

오늘 오후 1시 반, 국회박물관 강당에서 건대항쟁 40주년 토론회가 열립니다. 30일과 31일에는 건국대에서 사진전을 하고, 31일 토요일 오후에는 건국대 기림비 앞에서 기념식과 음악회가 이어집니다.

마지막 곡은 일부러 신나는 노래로 골랐습니다. 칠레 그룹 킬라파윤이 부른 〈엘 푸에블로 우니도 하마스 세라 벤시도〉, 우리말로 '하나로 뭉친 민중은 절대 지지 않는다'입니다. 1973년 칠레에서 군인들이 정권을 뒤엎기 몇 달 전에 나온 노래인데, 그 뒤 세계 곳곳의 거리에서 불렸습니다. 맞고, 갇히고, 기한에 막혀도 결국은 이긴다. 오늘은 무겁게 끝내지 않겠습니다.

한피디의 문화산책,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1986년 가을, 여러분은 어디 계셨나요? 댓글로 들려주세요. 내일은 첫 촛불 10년 이야기로 찾아오겠습니다.

♪ 클로징 곡
〈El pueblo unido jamás será vencido〉
킬라파윤 (1989년 공연)

농성장 이야기: 회보 「건대항쟁의 기억」 · 40주년 행사: 「동지여, 무지개가 떴습니다」

사진: 제38주년 10.28 건대항쟁 기념식(2024) · 참고: 경향신문(2026.4.22), 진실화해위원회 진실규명 결정(2025.5), 머니투데이방송(2026.8.21), 알자지라(2023.8.29), 대만 이행기정의위원회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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