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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피디의 문화산책] 악마라는 소문, 빨갱이라는 한마디

작성자
한피디
작성일
2026-10-27 08:00
조회
7
들라크루아가 그린 파가니니
ON AIR
한피디의 문화산책 · 여덟 번째 시간
악마라는 소문,
빨갱이라는 한마디
글·선곡 한피디

한피디의 문화산책은 대학 시절 FBS 방송국 마이크 앞의 감성으로 떠나는 문화 산책입니다. 그림 한 점, 노래 한 곡, 책 한 권에 담긴 사람과 시대 이야기를 나눕니다. 가끔은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도 곁들입니다. 신청곡과 사연은 댓글로 보내 주세요.

한피디의 문화산책, 여덟 번째 시간입니다. 며칠 무거운 이야기를 이어 왔으니 오늘은 숨을 좀 고르겠습니다. 오늘 10월 27일은 바이올린의 귀재 니콜로 파가니니가 태어난 날입니다. 1782년 이탈리아 제노바, 꼭 244년 전입니다.

첫 곡은 그의 〈카프리스 24번〉입니다. 2015년 파가니니 콩쿠르에서 우승한 양인모의 연주로 듣습니다.

♪ 오프닝 곡
〈카프리스 24번〉
파가니니, 바이올린 양인모

너무 잘해서 악마가 된 사람

파가니니는 다섯 살에 만돌린을, 일곱 살에 바이올린을 잡았고, 열한 살에 첫 무대에 섰습니다. 악보 없이 외워서 연주하는 독주자가 드물던 시절, 그는 무대를 휘저으며 손가락이 보이지 않을 만큼 빠르게 활을 놀렸습니다.

사람들은 그 실력을 설명할 길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소문을 만들었습니다. 악마에게 영혼을 팔았다, 어머니가 아들의 영혼을 팔았다. 빈의 어떤 관객은 연주하는 그의 옆에서 악마가 돕는 것을 봤다고 했습니다. 키가 크고 깡마른 몸, 창백한 얼굴, 검은 옷이 소문에 기름을 부었습니다.

앵그르가 그린 파가니니 소묘

앵그르가 그린 파가니니, 1819년 (퍼블릭 도메인)

4년 동안 묻히지 못한 몸

소문은 그가 죽은 뒤에도 그를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1840년 프랑스 니스에서 숨을 거두기 전, 그는 마지막 의식을 하러 온 신부를 돌려보냈습니다. 아직 죽을 때가 아니라고 여겼다고 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그것을 '악마와 한편'이라는 증거로 받아들였고, 거룩한 땅에 묻어 줄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의 몸은 두 달 동안 침대 위에, 1년 넘게 지하실에 있었습니다. 그 뒤 버려진 나환자 요양소로, 올리브기름 공장의 통 속으로 옮겨 다녔습니다. 4년 가까이 땅에 묻히지 못한 채였습니다. 그가 지금의 안식처인 파르마에 자리 잡기까지는 그 뒤로도 여러 번 자리를 옮겨야 했습니다. 소문 하나가 사람을 죽어서도 쉬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우리 집에도 그런 말이 있었다

저는 할아버지를 기억하지 못합니다. 대신 할아버지의 막내 동생, 작은할아버지는 또렷이 기억합니다. 6·25 때 총알이 몸을 스치고 지나갔지만 건강하게 천수를 누리셨고, 그 일로 훈장도 받으셨습니다. 오래 오지 않던 그 훈장은 노무현 정부 시절에야 뒤늦게 그분 손에 들렸습니다.

그런 작은할아버지가 제 어머니에게 하시던 말씀이 있습니다. "빨갱이를 낳았다." 데모하던 아들, 바로 저 때문이었습니다. 두 분 사이는 그 말 말고도 여러 일로 오래도록 전쟁터 같았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 말은 미움보다 두려움에서 나왔는지도 모릅니다. 총알이 스친 자리는 아물어도 그날의 공포는 평생 '빨갱이'라는 한마디로 남았을 테니까요. 하지만 그 한마디가 어머니 가슴에 남긴 자국은 총알이 스친 자리보다 오래갔습니다.

파가니니에게 '악마'가 그런 말이었다면, 우리 집에서는 '빨갱이'가 그런 말이었습니다.

소문은 지금도 사람을 묻는다

200년 전에는 살롱의 귓속말이 소문을 옮겼다면, 지금은 유튜브와 단톡방이 그 일을 합니다. 속도는 훨씬 빠르고, 지우기는 훨씬 어렵습니다. 실력이 뛰어나면 '악마', 생각이 다르면 '빨갱이', 질문을 던지면 '왜곡'. 딱지 하나 붙이는 데는 1초면 되지만, 그 딱지를 떼는 데는 한 사람의 평생이, 때로는 그 뒤의 몇 년이 걸립니다.

뒤집으면 사랑 노래가 된다

소문은 끝내 파가니니를 이기지 못했습니다. 그의 〈카프리스 24번〉은 리스트와 브람스가 다시 쓰고, 1934년 라흐마니노프가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랩소디〉로 다시 썼습니다.

라흐마니노프는 그 가운데 18번째 변주에서 재미있는 일을 했습니다. 파가니니의 선율을 위아래로 뒤집은 것입니다. 오르던 음은 내려가고 내려가던 음은 오르게. 그랬더니 '악마의 선율'이 세상에서 가장 낭만적인 사랑 노래가 되었습니다. 같은 음표도 뒤집어 보면 전혀 다른 얼굴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파가니니의 고향 제노바에서는 지금 그의 이름을 건 콩쿠르가 열립니다. 꼭 1년 전, 열다섯 살 한국 소녀 김현서가 이 대회에서 3위와 청중상을 받았습니다. 대회 역사상 가장 어린 수상자였습니다. 교회가 묻어 주기를 거부했던 사람의 이름 아래, 지금은 세계의 젊은이들이 모입니다.

한피디의 생각

소문은 그 사람보다 소문을 퍼뜨린 사람들에 대해 더 많이 말해 줍니다. 파가니니를 악마라 부른 것은 그의 연주가 아니라 사람들의 두려움이었습니다.

딱지는 붙이기는 쉬워도 떼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니 붙이기 전에 한 번 더 묻고, 퍼뜨리기 전에 한 번 더 확인해야 합니다.

세상은 뒤집어 볼 줄 아는 사람들이 바꿉니다. 라흐마니노프가 선율을 뒤집었듯, 10년 전 우리는 촛불로 세상을 뒤집었습니다.

모레 10월 29일은 첫 촛불이 켜진 지 꼭 10년이 되는 날입니다. 그 이야기는 그날 아침에 들려드리겠습니다.

마지막 곡은 라흐마니노프의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랩소디〉 18번째 변주입니다. 피아노 다닐 트리포노프의 연주입니다. 악마의 선율을 뒤집어 만든 사랑 노래, 3분이면 충분합니다.

한피디의 문화산책,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여러분 집안에도 '그 한마디'가 있었나요? 댓글로 들려주세요.

♪ 클로징 곡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랩소디〉 18변주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다닐 트리포노프

그림: 들라크루아 〈파가니니〉(1831), 앵그르 〈파가니니〉(1819) · 위키미디어 공용(퍼블릭 도메인)

참고: Classic FM 'Niccolò Paganini and the devil', 헤럴드경제 김현서 파가니니 콩쿠르 수상 보도(2025.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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