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피디의 문화산책] 10월 26일, 총성이 두 번 울린 날

총성이 두 번 울린 날
한피디의 문화산책은 대학 시절 FBS 방송국 마이크 앞의 감성으로 떠나는 문화 산책입니다. 그림 한 점, 노래 한 곡, 책 한 권에 담긴 사람과 시대 이야기를 나눕니다. 가끔은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도 곁들입니다. 신청곡과 사연은 댓글로 보내 주세요.
한피디의 문화산책, 일곱 번째 시간입니다. 오늘은 10월 26일. 우리 역사에서 이 날짜에는 총성이 두 번 울렸습니다. 1909년 하얼빈역에서, 그리고 꼭 70년 뒤인 1979년 서울 궁정동에서.
첫 곡은 뮤지컬 〈영웅〉에서 안중근을 연기해 온 배우 정성화의 노래입니다.
1909년, 하얼빈역 오전 9시
117년 전 오늘 아침, 러시아 의장대를 사열하던 이토 히로부미가 쓰러졌습니다. 세 발의 총성 뒤에 서른 살 청년 안중근은 도망가지 않고 "코레아 우라(대한 만세)"를 외치며 붙잡혔습니다.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역. 왼쪽에서 두 번째가 이토 히로부미 (퍼블릭 도메인)
그가 위대한 까닭은 방아쇠가 아니라 그 뒤에 있습니다. 그는 자신을 살인자가 아니라 대한의군 참모중장, 곧 전쟁 포로라고 했습니다. 일본 법정에서는 명성황후 시해부터 시작해 이토의 죄를 하나하나 따졌습니다. 1910년 2월 사형 선고를 받고도 항소하지 않았고, 뤼순 감옥에서 남은 날들을 쪼개 『동양평화론』을 쓰다가 끝내 마치지 못했습니다. 한·중·일이 함께 평화 회의를 만들고, 공동 은행과 공용 화폐를 두자는 구상이었습니다. 총을 든 손으로 평화의 설계도를 그린 셈입니다.
맨 위 글씨는 그가 감옥에서 남긴 유묵 '忍耐(인내)'입니다. 총을 쏜 사람이 마지막에 남긴 말이 '참고 견디라'였습니다. 그는 1910년 3월 26일 순국했고, 나라를 되찾거든 뼈를 고국에 묻어 달라고 했지만, 그 유해는 아직도 찾지 못했습니다.

1908년 만주에서 의병 활동을 하던 무렵의 안중근 (퍼블릭 도메인)
1974년, 극장 안의 총성
두 총성 사이에 또 하나의 총성이 있습니다. 1974년 8월 15일 광복절 기념식, 생중계 중이던 국립극장에서 육영수 여사가 총에 맞아 숨졌습니다. 정부는 재일교포 문세광이 북한의 지령을 받아 저지른 일이라고 발표했고, 문세광은 그해 12월 사형되었습니다.
지난 추석에 개봉한 허진호 감독의 영화 〈암살자(들)〉이 바로 이 사건을 다룹니다. 제목의 괄호가 묻습니다. 정말 한 사람이었나. 영화는 공범이 있었을 가능성, 그리고 김대중 납치 사건으로 궁지에 몰렸던 정권이 무엇을 얻었는지를 상상으로 짚어 봅니다.
영화가 정답을 내놓은 것은 아닙니다. 다만 국가가 발표한 '진실'을 그대로 믿지 말고 기록을 다시 보자고 말합니다. 그 질문에 일부 정치인과 단체는 역사 왜곡이라며 배우의 집 앞까지 찾아가 시위를 했습니다. 그래도 관객은 늘어, 개봉 2주 만에 220만 명이 넘게 극장을 찾았습니다. 질문을 막으려 할수록 사람들은 더 묻고 싶어집니다.
1979년, 궁정동의 밤
그로부터 5년 뒤, 부산과 마산의 거리가 "유신 철폐"로 뒤덮이고 열흘이 지난 10월 26일 밤. 궁정동 안가의 술자리에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박정희 대통령과 차지철 경호실장을 쏘았습니다. 18년 독재가 그렇게 끝났습니다.
김재규는 법정에서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고 말했고, 1980년 5월 사형되었습니다. 그가 민주주의를 위해 쏘았는지, 권력 다툼 끝에 쏘았는지는 지금도 논쟁입니다. 지난해 법원은 45년 만에 재심을 열었고, 올해 12월 16일 다시 판결이 나옵니다. 47년이 지나도 그날 밤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총성은 독재자를 쓰러뜨렸지만
여기서 짚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1979년의 총성은 독재자를 쓰러뜨렸지만 독재를 끝내지는 못했습니다. 두 달도 안 돼 12·12 군사 반란이 일어났고, 다음 해 5월 광주에서 또 다른 군인들이 시민에게 총을 겨눴습니다. 권력의 심장을 쏜 총성 뒤에 온 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라 다음 장군이었습니다.
독재를 정말로 끝낸 것은 총이 아니었습니다. 1987년 6월 거리를 메운 넥타이 부대와 학생들, 2016년 겨울 광화문의 촛불, 2024년 겨울 국회 앞의 응원봉. 총은 한 사람을 쓰러뜨릴 수 있지만, 체제를 바꾸는 것은 함께 선 사람들입니다.
한피디의 생각
역사는 '누가 쏘았나'보다 '무엇을 위해 쏘았나'를 끝까지 묻습니다. 안중근이 117년이 지나도 의사로 불리는 것은 그가 법정과 감옥에서 그 '무엇'을 분명히 남겼기 때문입니다.
국가가 내놓은 결론도 질문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1974년의 수사 발표도, 1980년의 군사 재판도 다시 들여다봐야 합니다. 영화든 재심이든, 묻는 것을 '왜곡'이라 몰아붙이는 쪽이 오히려 무언가를 감추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물어야 합니다.
아직 끝나지 않은 일들이 있습니다. 찾지 못한 안중근의 유해, 12월의 재심 판결, 밝혀지지 않은 1974년의 진실. 기억하고 기록하고 묻는 일을 멈추지 않는 것, 그것이 총 대신 우리가 들 수 있는 것입니다.
사흘 뒤 10월 29일은 첫 촛불이 켜진 지 10년이 되는 날입니다. 총성이 아니라 촛불로 권력을 바꾼 나라, 그것이 1909년 하얼빈의 청년이 꿈꾼 나라에 더 가깝지 않을까요.
마지막 곡은 양희은의 〈아침이슬〉입니다. 1971년에 나온 이 노래는 유신 시절 금지곡이 되었지만, 끝내 사람들의 입을 막지 못했습니다. 긴 밤이 지나고 맺히는 아침 이슬처럼, 그날들을 건너온 모든 분께 이 노래를 드립니다.
한피디의 문화산책,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1979년 10월 27일 아침, 그 소식을 어디서 들으셨나요? 댓글로 들려주세요.
사진·유묵: 위키미디어 공용(퍼블릭 도메인) · 유묵 '忍耐'는 보물로 지정된 안중근 의사 유묵
참고: 주간경향 〈암살자(들)〉 관련 보도(2026.10.5), 스포츠경향(2026.6.30), 데일리안 김재규 재심 보도(2026.9.30), 한국경제 생글생글 '술술 읽히는 한국사'
안중근열사가 잍히로부미를 쏘았던 날과 같은 날인지 몰랐네요.
79년 10월 27일 총성소식은 아마도 뉴스가 아니었을지 싶습니다. 기억이 잘 안나요.
그런데 다음날 학교에(당시 중3) 갔더니 대통령 저격 당해서 서거하셨다며 난리가 났어요.
학생들을 운동자에 모이게 하고 추모했고,
역사에 대한 별다른 인식이 없던 중3 여학생인 저는 무서웠던 느낌을 기억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