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딛는 한 걸음이 그날의 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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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경

불어과 83

나는 약초꾼이다.

사람은 게으른데 부지런한 시간은 5월을 지나 6월을 타고 넘어가고 있다. 지난 5월에는 맛있는 야생초 차를 만들어 볼 요량으로 1m 남짓 자란 배초향 두 다발과 토종 엉겅퀴 꽃봉오리를 한 바구니 따다가 잘 손질해 말리던 중 갑자기 내린 소나기에 큰 낭패를 보았다. 잔뜩 골이 나서 배초향 차는 고사하고, 이후에 인진쑥과 박하 그리고 인동꽃과 소루쟁이로 뭐 좀 만들어 볼까 하는 마음까지도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렸다.

잃어버린 것은 이뿐만 아니다. 이런저런 개인 사정으로 엉겁결에 70그루 정도 되는 복숭아 과수원을 맡아 몇 달째 약초꾼에서 농사꾼으로 생활을 겸하고 있다.

일머리가 없다 보니 가장 먼저 과수밭 주변 정리를 하였다. 다음은 대략 보름 정도를 나무들의 수형을 살펴가며 전지 작업을 어설프게라도 마무리하였다. 이때다 싶어 단양과 영월 일대 산들을 돌아다닌 것도 잠시, 날씨가 따뜻해지니 복숭아나무는 온통 화사한 복사꽃으로 뒤덮이기 시작하였다. 꽃구경은커녕 이 무한한 꽃들을 한 가지에 몇 송이씩만 남겨 두고 거의 훑어 주듯이 따 줘야만 하였다. 중간에 나무 밑동에 거름도 뿌려 주었다.

그래도 나는 약초꾼이지 않은가

어쩌다 시간이 나면 가까운 산에 오르기도 하였다. 마치 산에 가는 것이 군인 아저씨들이 설레는 마음으로 휴가 가는 것과 같아서, 그만한 해방감을 느꼈었다. 이런 소중한 행복감을 그동안은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살아왔었다니, 오랜 세월 나를 받아주고 품어준 대자연의 산에 대한 고마운 마음을 새삼 갖게 되었다. 우연히 산삼도 2뿌리, 장생도라지, 잔대, 더덕, 삽주, 하수오 등 조금씩은 얻어 오긴 했지만, 산행 중에 적당한 장소를 만나면 대부분의 시간은 자리 깔고 앉아 막걸리 한잔 마시면서 새소리, 바람소리, 나뭇잎 부딪치는 소리, 알지 못하는 세상의 소리를 듣다가 내려오곤 하였다.

복사꽃이 지고 난 자리에는 어김없이 복숭아가 알알이 매달리기 시작하였다. 나중에 튼실하고 맛있는 복숭아를 수확하기 위해서는 한 가지에 한두 개씩만 남겨 두고 나머지 열매들은 모두 따 주어야만 하였다. 감사하게도 여러분이 내려오셔서 한 손씩 거들어 주어 어느 정도 도움은 받았으나, 이후로도 한 달 동안은 계속해서 위로 뻗으면서 자라는 새 가지들을 잘라 주는 전지 작업과 병행해서 불필요한 복숭아들도 따 주었다. 최근 며칠간은 몇 품의 일손을 사서 복숭아 봉지 싸 주는 일 또한 마무리할 수 있었다.

이제는 과수밭 잡초 정리를! ‘사람들은 제초제를 뿌리면 간단히 해결된다’며 재촉하듯이 말해 주곤 하였지만 정말이지 내키지 않았다. 이 무더운 날 두툼한 바지를 입고 네발로 기어다니면서 풀 뽑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결코 끝나지 않을 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사람이 결코 이겨낼 수 없다는 풀이라지만, 적어도 나는 여전히 농사꾼을 빙자해 자연을 사랑하며 산에서 살아가고 앞으로도 산에서 살아갈 약초꾼이지 않은가! 이 지난한 시간이 지나고 나면 실패할지 성공할지는 알 수 없으나, 적은 돈이라도 손에 쥐게 되면 어쩌면 약초꾼이 유일하게 부채감을 가지고 있는 달랑 하나 있는 아들 녀석 늦깎이 공부하는 데 한 학기 등록금이라도 해 주기를 소망한다. 이게 지금의 인생이고 전부이다!

신기한 경험이었다

해마다 약초꾼에게는 전국귀농귀촌운동본부를 비롯하여 여러 단체나 모임에서 산나물 체험이나 가을 버섯 체험을 하러 찾아오곤 한다. 올해에도 100여 명의 사람들이 네 번에 걸쳐 다녀갔다. 그중 지난 3월에는 발효학을 공부한다는, 텍사스에 사는 27살 청년 제임스가 있었는데, 체험활동 중간중간에 엄지척과 함께 연신 ‘원더풀’을 외쳐대며 약초꾼을 ‘허브마스터’라고 놀리곤 하였다. 시간이 흘러 그가 발효학 마스터가 되기를 바란다.

약초 체험 산행은 약초꾼이 숨겨 놓은 무슨 비밀이 있어서가 아니라, 스무 명이 넘는 여러 사람과 함께하는 것이라 혹시라도 생길지 모를 사고 때문에 진행하지 않고, 봄에는 주로 산나물 체험을 위주로 한다.

뱀에 물린 이야기, 벌에 쏘여 실신한 이야기, 바위에서 미끄러져 떨어져 손가락 부러진 이야기 등을 해 주면 약초 체험 산행은 아예 말도 꺼내지 않는다. 나물 체험만으로도 이미 충분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약초꾼이 좋아하는, 겨울을 이겨내고 올라오는 까실쑥부쟁이, 쑥부쟁이, 개쑥부쟁이와 미역취, 산미나리, 전호, 참당귀, 백지, 연삼, 어수리, 참반디, 참취….

일정을 마치고 마무리 자리에서 그들은 한결같이 ‘재미는 물론 보람 있는 시간이었다’고 말하는 대신 ‘신기한 경험이었다’고 말하였다. 왜 모두가 그렇게 말하였을까! 어눌한 약초꾼의 언변과 안내에도 체험에 참가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그간 살아오면서 생각하지도 보지도 알지도 못한 또 다른 세상의, 그것도 아주 가까운 곳에 있는 아주 작은 부분만을 보았음에도 가슴 벅찬 신비로운 경험을 했던 것이다.

이제 모든 이들이 오르내리는 등산로가 아닌, 자신이 내딛는 한 걸음 한 걸음이 그날의 길이 되는 미지의 세계로 들어가 보자! 그곳에서 어쩌면 병원에서 내어 주는 알약이 아닌, 인류의 마지막 건강한 먹거리를 하나씩 찾아내는 즐거움은 물론, 조용하게 하지만 거세게 움직이는 세상의 소리를 들어 보는 신비로운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장맛, 약초술, 그리고 청풍호

얼마 전에는 메주장 담근 장독에서, 시기적으로 좀 늦기는 했지만 초간장을 걸러 내었다. 간장물은 초봄에 산에서 얻어온 박달나무 수액과 옻나무 속껍질 달인 물을 사용하였다. 역시 장은 손맛이 반이요 재료가 반이라는 말에 틀림이 없다. 갓 거른 간장임에도 특별한 감칠맛이 느껴졌다. 이 간장은 늦여름에 야생 산초 열매로 다시 한 번 숙성을 하여 맛과 약성의 깊이를 더하게 될 것이다. 건져낸 메주 또한 맛이 구수하였고, 잘 치대어 장독에 꾹꾹 눌러 담아 놓았으니 잘 익어갈 것이다.

약초꾼의 일상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하나 있는데, 바로 약초술이다. 지난번 단양 산행 중에 소백산에서 아주 굵직한 더덕 한 뿌리를 얻어왔다. 이 녀석은 머지않아 한잔 나누어 마실 인연이 닿는 누군가를 기다리며 잘 익어가고 있다.

약초술의 으뜸은 누가 뭐라 해도 산삼주이다. 맛과 향취가 그 여느 술과 비할 바가 아니기 때문이다. 달콤한 더덕주! 마치 고량주처럼 목구멍을 따갑게 자극하는 도라지주! 술의 색깔은 물론 맛의 여운이 길고도 감칠맛 나는 지치주! 향기로운 하수오주! 그 외에도 좋은 사람들과 함께 마시면 더욱 빛이 나는, 각자 고유한 맛과 향 그리고 약성을 지닌 여러 약초술들! 올해도 많이 담가야 하는데 생각대로 될지는 잘 모르겠다.

벌써부터 청풍호에 나룻배 띄워 시원한 맥주 한 잔의 여유를 부리고, 금수산 용담폭포 물이 투명하게 내려올 때 개복숭아를 따서 맨몸으로 피서도 즐기면서, 폭포 물에 깨끗이 씻어 개복숭아 효소를 담글 날이 기다려진다. 복숭아 농사는 어떻게 하고!!!

다음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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