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월에서 유월로 — 기억과의 전쟁
— 광장이 미처 닿지 못한 자리에 부쳐
강민신
공감소통위원장, 스페인어과 85학번
올해도 유월이 왔다
서른아홉 해 전, 그 유월의 광장에 우리가 있었다. 최루탄이 자욱한 거리에서 서로의 어깨를 겯고 버티던 청년들. 그 청년들이 이제 환갑을 넘겨, 손주의 손을 잡고 누군가의 아버지로, 누군가의 어른으로 늙어가고 있다. 그렇게 사십 년에 한 해를 남긴 시간이 흘렀다.
흘렀다는 말은 가볍지만, 그 가벼운 한마디 안에는 사십 년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 시간을 어떻게 다음 사람의 손에 건넬 것인가 — 그 물음은 결코 가볍지 않다. 이어짐이란 저절로 흘러가는 강물이 아니어서, 누군가 두 손으로 받아 다음 사람에게 건네야, 비로소 끊기지 않고 이어진다.
이번 유월 한 달 내내, 머리에서 떠나지 않은 물음이 하나 있었다.
우리는 무엇을 기억하고 있는가. 그리고 그 기억은, 우리 뒤를 따라오는 이들의 손에까지 가 닿고 있는가.
광주, 그리고 동학의 길을 따라
지난 오월 열엿새와 열이레, 외민동은 또 한 번 광주로 내려갔다. 재건 이후 해마다 한 번도 거르지 않은 5·18 역사기행이다. 처음에는 버스 한 대로도 넉넉하던 길이, 이제는 두 대로도 자리가 모자랄 만큼 늘었다.
광주에서 하루를 보내고 저녁이 깊어지면, 우리 발걸음은 해마다 다른 고장으로 향한다. 담양에서 정읍으로, 그리고 다시 장성으로. 행선지는 매번 달라지지만 그 길은 우연이 아니다. 우리가 가만히 따라 밟는 것은 동학의 발자국이기 때문이다. 1894년, 보국안민의 깃발이 지나간 그 흙길을, 백 년도 더 지난 오늘의 신발로 다시 디뎌보는 일이다.
그러니 우리가 해마다 광주를 찾는 까닭은 5·18을 추모하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1894년의 동학에서 1980년의 광주로, 1987년의 광장으로, 그리고 2024년 겨울의 거리로 — 민(民)의 길로 굽이쳐 흐른 그 길게 이어진 길을 우리 몸으로 한 번 더 살아내는 일이다.
이어짐은 입으로 외워서 되는 일이 아니다. 발로 그 길을 다시 걸어야 비로소 몸에 새겨진다.
그리고 그 이어짐이 가능하려면, 맨 앞자리에 먼저 기억이 서 있어야 한다.
기억과의 전쟁
외민동이 해마다 벌이는 모든 일은 결국 하나의 전선으로 모인다. 기억과의 전쟁이다.
거창해 보이는 말이지만, 들여다보면 뜻밖에 정확한 말이다. 기억은 가만히 두면 저 혼자 사라진다. 시간이 지나면 빛이 바래고, 새로운 사건이 닥치면 옛 사건은 그 아래 조용히 묻힌다. 게다가 권력은 늘 어떤 기억은 지워 없애고, 어떤 기억은 슬그머니 새로 끼워 넣으려 한다. 그래서 손을 놓고 있으면, 어느새 권력이 골라준 기억이 우리 안에 들어앉아 마치 우리 것인 양 행세한다.
기억은 누군가 두 손으로 붙들고 있을 때에만 살아남는다. 해마다 광주를 다시 찾는 일, 동학의 흙길을 걸어보는 일, 박종철과 이한열의 이름을 소리 내어 다시 부르는 일, 1987년의 유월을 뒤따라오는 이들의 귀에 들려주는 일. 이 모두가 같은 전선 위에 나란히 서 있다.
광장에 나가 외치고, 집회에 몸을 보태고, 시국에 응답하는 일도 물론 귀하다. 다만 그 응답이 어디서 흘러나와 어디로 흘러가는지를 정하는 것은, 결국 우리가 무엇을 기억하고 있느냐다. 이 전선이 무너지면, 나머지 모든 응답은 갈 곳을 잃고 흩어진다.
박종철과 이한열, 멈춰 있는 청년들
박종철은 스물셋에, 이한열은 스물둘에 우리 곁을 떠났다.
살아 있었다면 지금쯤 우리와 나란히 환갑을 넘겼을 사람들이다. 손주를 품에 안아보고, 정년 퇴임식에서 꽃다발을 받고, 어느 동문 모임의 좌장 자리에 앉아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두 사람은 그 나이 그대로 멈춰 서 있다. 우리는 해마다 한 살씩 나이를 먹어가는데, 그들만은 거기 그 나이 그대로 남아 있다.
이것이 이어짐의 가장 잔혹한 비대칭이다. 그들이 남기고 간 시간은 우리가 받아 살고 있는데, 우리는 그들에게 단 한 줌의 시간도 되돌려줄 수가 없다. 부채감이라는 말로는 그 무게를 다 담지 못한다. 그들이 미처 다 살지 못한 유월을 우리가 대신 살아내고 있다는 사실은, 유월이 돌아올 때마다 한 겹씩 더 두꺼워진다.
산 자에게 남은 첫 번째 몫은 그 이름들을 잊지 않는 일이다. 이름이 지워지는 순간, 그들이 우리 손에 쥐여준 시간마저 함께 지워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시, 광장이 왔다
그렇게 받아 든 시간이, 재작년 십이월 어느 밤 한순간에 통째로 무너질 뻔했다.
비상계엄이 선포되던 그 밤, 우리는 저마다의 자리에서 깨어 있었다. 누구는 외투도 챙기지 못한 채 국회로 내달렸고, 누구는 단톡방으로 서로의 안부를 더듬어 확인했고, 누구는 텔레비전 앞에서 뜬눈으로 새벽을 기다렸다. 이튿날 새벽, 계엄 해제를 알리는 자막이 화면에 떠오르던 순간, 우리 마음에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1980년의 오월과 1987년 유월의 광장이었다. 그 광장을 만들어낸 어떤 불씨가 우리 안에서 한 번도 완전히 꺼지지 않은 채 잠들어 있었음을, 우리는 그날 밤 비로소 확인했다.
그 불씨가 되살아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우리가 그 유월을 끝내 잊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동안의 모든 모임과 기행과 학습이 그 기억에 가만히 숨을 불어넣어 두지 않았더라면, 그 밤의 응답 또한 끝내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그 깨어남은 봄에는 파면으로, 유월에는 정권교체로 이어졌다. 광장이 두 번 응답한 것이다
다만 한 가지 물음이 가시처럼 박혀 남는다. 그 광장에서 응원봉을 흔들던 젊은이들에게, 그 불씨는 정말로 옮겨붙은 것일까. 아니면 우리 세대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그 불을 지핀 것에 지나지 않을까. 그 젊은이들은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바라보고 있을까.
오랫동안 나는 이 물음 앞에서 답을 갖지 못했다. 그런데 이번 유월, 그 답의 한 자락이 어렴풋이 보이기 시작했다.
다른 땅 위의, 같은 청춘
6월 3일, 제9회 전국동시지방선거가 치러졌다. 광역단체장 열여섯 자리 가운데 더불어민주당이 열두 곳을, 국민의힘이 네 곳을 가져갔다. 서울에서는 오세훈이 다시 시청 문을 열고 들어갔고, 대구에서는 김부겸이 끝내 그 문턱을 넘지 못했다. 빛의 혁명을 지나온 직후 처음 치러진 선거였다.
결과가 나오자 흔한 말이 돌았다. 젊은 세대가 보수로, 더러는 극우로 돌아섰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 손쉬운 답이다. 표를 한 칸씩 차분히 들여다보면 그렇게 간단하지 않고, 그 손쉬운 답이 가린 진실은 오히려 더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
그 젊은이들이 우리에게서 등을 돌린 것이 아니다. 다만 그들이 딛고 선 땅이, 우리가 그 나이에 디뎠던 땅과 같지 않을 뿐이다. 사람이 달라진 것이 아니라, 발밑의 땅이 달라진 것이다.
우리의 유월은 거대한 이야기였다. 독재냐 민주냐, 광장이냐 침묵이냐. 맞서야 할 상대의 얼굴이 또렷했고, 그 싸움의 끝에는 분명한 문이 하나 열려 있었다. 민주화라는 이름의 문이었다. 지금의 젊은이들에게도 거대한 이야기가 없는 것은 아니다. 무너지는 출생률, 바닥을 드러낸 연금, 사다리를 치워버린 집값, 두 동강 난 일자리. 그들 역시 이 나라가 천천히 기울고 있음을 안다. 아니, 어쩌면 우리보다 더 또렷이 본다. 다만 그들이 마주한 쇠퇴에는, 밀고 나아갈 문이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똑같은 절박함이 우리에게서는 광장으로 터져 나왔고, 그들에게서는 무력감과 각자도생으로 조용히 가라앉았다.
1987년의 유월이 그들에게 가닿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들이 무심해서가 아니다. 우리의 기억이 그들이 오늘 쓰는 말로 미처 옮겨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기억하라’고 말하는데, 그들은 ‘오늘 하루를 어떻게 버티나’를 묻고 있다. 같은 방 안에 마주 앉아 있으면서도, 두 물음은 끝내 서로를 알아듣지 못한다.
그러니 기억과의 전쟁에서 가장 넘기 어려운 고비는, 실은 권력이 아니다. 우리가 먼저 걸어온 그 길에서, 이제 막 들어선 다음 굽이이다. 우리가 그 굽이까지 우리의 기억을 들고 마중 나가지 못한다면, 우리의 유월은 우리 세대와 함께 그 자리에 멈춰 선다. 그들이 우리 손에 건넨 시간이, 그들이 아니라 우리에게 이르러 길을 잃는다.
닿지 못한 자리들
이어짐을 말할 때 우리는 흔히 따뜻한 풍경을 떠올린다. 한 세대가 다음 세대에게 가만히 내미는 손, 한 광장에서 다음 광장으로 잔잔히 번지는 함성. 그러나 이어짐에는 또 다른 얼굴이 있다. 끝내 가닿지 못한 자리들이다.
광장의 함성이 미처 흘러들지 못한 곳들. 교실과 일터와 부엌, 그리고 우리 시야 바깥에 흩어져 있는 수많은 자리들. 그 함성이 거기까지 닿지 못했다면, 그곳이 멀어서가 아니다. 우리의 기억이 거기까지 미처 걸어가지 못한 탓이다. 그리고 이번 유월, 우리는 그 닿지 못한 자리 가운데 가장 너른 하나가 바로 우리 뒤를 따라오는 젊은 세대였음을 보았다.
기억되지 못한 자리에서는, 광장도 끝내 피어나지 않는다.
'우리'라는 자리
‘우리’는 한국어에서 가장 따뜻한 말 가운데 하나다. 우리 가족, 우리 동네, 우리 외민동. 그런데 그 말은 따뜻한 만큼 위험하기도 하다. ‘우리’라는 울타리 안에 든 이름만 정답게 부르다가, 울타리 밖에 남겨진 이름은 그만 잊어버리기 쉽기 때문이다.
기억되지 못한 자리에서는, 광장도 끝내 피어나지 않는다.
외민동이 옛 동지들의 향수 어린 동창회가 아니라 지금도 숨 쉬는 공동체이려면, 우리가 부르는 ‘우리’ 안에 누가 들어와 있고 누가 빠져 있는지를 끊임없이 되물어야 한다. 그리고 한 가지를 잊지 말아야 한다. 그 젊은이들은 ‘우리’ 바깥에 선 사람들이 아니다. 다만 우리가 아직 ‘우리’라고 불러주지 못한 사람들일 뿐이다. 박종철과 이한열을 부르는 호명이 헛돌지 않으려면, 오늘 우리가 미처 그 이름으로 부르지 못한 이들에 대한 빚과 나란히 가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이참에 작은 일에서부터 새로 시작해야 한다. 세대가 마주 앉는 자리다. 우리가 젊은 사람들을 앞에 두고 가르치는 자리가 아니라, 그들이 말하고 우리는 가만히 입을 다물고 듣는 자리다. 거창하지 않아도 좋다. 먼 길도 늘 첫 한 걸음에서 시작되니까.
이렇게 또 한 번 유월이 흘러간다.
서른아홉 해 전 광장에 섰던 그 마음을, 뒤따라오는 이들의 손에 건네는 일. 그 일이 가능하려면, 먼저 그 기억을 우리 손에서 놓지 않는 일. 그리고 이제야 나는 안다 — 그 기억을 그들이 오늘 쓰는 말로 옮겨 적지 못한다면, 아무리 두 손으로 꼭 쥐고 있어도 끝내 다음 손으로 건너가지 못한다는 것을.
다음 유월이 다시 문을 두드릴 때, 우리는 이번 유월에 어떤 답을 손에 들고 그 자리에 서 있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