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로시마에 핵폭탄이 떨어질 때 조선인이 있었다

—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 81주년 조선인 희생자 추모제 참가기

Picture of 허윤숙

허윤숙

아랍어과 95

검게 탄 십자가 아래서

회색 목회자 셔츠를 입은 흰머리의 일본인 목사가 고개를 숙인다.

“(일본어로) 우리 교회는 태평양전쟁의 승리를 위해 예수님께 기도했습니다.“

신도들이 함께 기도한다.

“ (일본어로) 신이시여, 우리의 죄를 용서하소서.”

검은 승복을 입은 일본 불교 종단의 승려들이 묵념을 한다.

“(일본어로) 본원사 교단은 한일병합 이후 한반도 각지 50곳에 포교소를 세워 일본인 커뮤니티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담당했고 현지 사람들에 대한 황민화 정책과 식민지 지배의 일익 또한 담당했습니다.”

2026년 8월 5일. 일본 히로시마. 히로시마 시내에 있는 나가레가와 교회다.

지금으로부터 81년 전. 1945년 8월 6일 오전 8시 15분.

당시 폭탄이 떨어진 지점으로 추정되는 곳에서부터 1킬로미터도 안 되는 거리에 있는 이 교회는 원자폭탄에 맞았다. 고딕풍 콘크리트 건물이라 외벽은 서 있었지만 안은 모두 불탔다고 한다. 커다란 나무 십자가도 불에 탔다. 그 십자가를 버리지 않고 새로 지은 교회에 매달았다. 다시는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염원이다.

검게 탄 십자가 밑에서 목사와 승려들이 81년 전 원자폭탄에 맞아 희생된 조선인들에게 잘못을 고하고 추모한다.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 81주년 조선인 희생자 추모제’다.

위의 보랏빛 두 사진이 원자폭탄에 피폭된 나가레가와 교회다. 당시 폭탄이 떨어진 지점에서 교회는 1킬로미터도 안 되는 거리에 있었다.
위의 보랏빛 두 사진이 원자폭탄에 피폭된 나가레가와 교회다. 당시 폭탄이 떨어진 지점에서 교회는 1킬로미터도 안 되는 거리에 있었다.

공항에서 붙잡힌 현수막

이 추모제에 참가하기 위해 우리는 이틀 전인 8월 3일 오전 9시쯤 히로시마 공항에 도착했다.

우리는 현상윤(중국어과 74), 김태혁(영어과 81), 이중원(무역학과 83), 양봉열(무역학과 90), 최재직(스페인어과 95), 허윤숙(아랍어과 95)이다.

“공항 통과할 때 준비한 현수막은 나눠서 갖고 들어오세요. 짐 검사를 까다롭게 합니다.”

작년부터 추모제를 준비해 온 조원호 위원장이 추모제 참가단 단체 텔레그램에 남긴 메시지다. 사전 준비를 하려고 우리보다 하루 먼저 도착했는데 삼엄함을 느꼈다는 거다.

그날 오후 시내 행진 출발지인 ‘원폭평화기념관’ 앞에서 수없이 늘어선 사람들과 깃발을 보고 알았지만, 히로시마는 이즈음이 관광으로 치면 성수기라는 것이다. 일본과 세계에서 핵무기를 반대하고 평화를 염원하는 사람들이 모여들기 때문이다. 일본 극우들에게도 이즈음은 중요한 시기라고 한다. 1945년 8월 미국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핵폭탄을 떨어뜨려서 히로시마에서는 약 14만 명, 나가사키에서는 약 7만 명이 사망했다. 일본의 극우세력들이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일으켰고 수많은 나라를 수탈하고 식민지로 삼았던 일들은 감추고 오로지 피해 상황만을 앞세워 이른바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기에 딱 좋은 기간이기 때문이다.

극우세력들과 전쟁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자칫 충돌할 수도 있어 공항 보안이 더 삼엄해진 듯싶었다.

나도 캐리어에 ‘일본은 조선인 원폭 희생자에게 사죄하고 배상하라’와 같은 일본어와 한국어 문구가 적힌 현수막을 넣고 입국심사를 받는지라 가슴이 두근거렸다.

여기 왜 왔냐고 한국말로 묻는 공항 직원에게 ‘관광하러 왔다’며 방글거리며 대답해서인지 나는 문제없이 입국심사대를 통과했다. 그런데, 재직이가 딱 걸려서 나오지를 못했다. 재직이 가방에도 현수막이 들어있다.

곧 나오겠지 했는데 10분이 지나고 20분이 지나고 이제 곧 공항 리무진을 타고 떠날 시간이 되어간다.

히로시마 공항은 내 생각에 여수공항의 반 정도밖에 안 되는 규모다.

입국심사를 받은 중장년층의 남녀들이 알고 보니 거의 우리 일행이었다.

우리 외민동과 대전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우리학교시민모임, 한강 YMCA, 환경운동연합 등에서 온 24명이었다. 이 중 재직이와 다른 한 명만 입국이 늦어지고 있었다.

다른 한 명은 몇 년 전에 시위하다가 일본에서 추방된 적이 있었는데, 그 사실을 입국 카드에 적지 않아 전산에서 걸린 모양이었다. 아마도 그분은 전문 데모꾼(?)인 듯하고. 우리 재직이는 아주 순진무구한 중년인데 이게 무슨 일인지….

재직이는 한 달 전부터 히로시마 추모제 준비에 열과 성을 다했다.

추모제에서 한국측 대표로 노래를 부르기로 한 것이다.

선곡에서도 여러 날 고민하고, 기타를 갖고 가기로 한 순간부터는 기타 케이스까지 새로 장만했다. 새 기타 케이스에 흠집이라도 날까 봐 은색 뽁뽁이로 감았는데 그거 때문에 기타가 이상한 물건으로 의심을 받았을까? 현수막이 걸렸을까? 재직이는 이대로 추방당하는 걸까?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그사이 전에 간사이 공항에서 추방당했지만 입국카드에 쓰지 않아서 입국을 하지 못하고 있던 문제의 그분이 입국심사대를 통과했다. 그분은 전혀 데모꾼처럼 생기지 않은 인상 좋은 여성분이셨다. 계속 왜 나를 못 나가게 하느냐 항의를 거듭한 끝에 풀려났다고 하셨다.

여전히 우리 외민동의 재직이만 입국을 허가받지 못하고 있었다.

일본 땅에 오자마자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재직이가 추모제에서 공연하려고 매일 연습했다는 걸 알기에 너무 안타까웠다.

일본말 잘하는 한국 변호사라도 구해야 되는 거 아닌가 했는데….

드디어!

재직이가 새하얗게 질린 얼굴을 하고 입국심사대를 통과해 나왔다.

“왜 방문했냐고 심사대에서 물어서 공연하러 왔다고 했더니 어디서 공연하냐고 하길래 교회에서 한다고 했더니 갑자기 짐 검사를 하는 거야….”

재직이는 멘탈까지 한 올 한 올 모두 털린 얼굴이었다.

그들은 기타 케이스 포장까지 다 뜯어서 안을 보고, 트렁크도 열었다고 한다. 트렁크 안에서 내가 갖고 있는 현수막과 비슷한 내용의 현수막이 나왔고, 그걸 재직이더러 들고 있으라고 하고는 사진까지 찍었다고 한다.

“이제 재직이는 일본 못 온다. ‘독도는 우리 땅’ 부른 가수 정광태도 일본 못 들어온다. 이승철도 독도에서 공연했다고 못 들어와”라며 태혁 선배가 재직이를 걱정(?)했다.

우여곡절 끝에 입국을 한 재직이와 함께 히로시마 공항에서 입국 기념 촬영.
우여곡절 끝에 입국을 한 재직이와 함께 히로시마 공항에서 입국 기념 촬영.

그렇게 현수막을 공수해서 펴 든 곳은 그날 오후 원폭평화기념관 앞이었다.

올해 여름이 유난히 더운 것은 모두가 아는 바일 테다.

일본 히로시마 역시 8월이 가장 덥다.

심지어 우리가 히로시마로 떠나기 얼마 전, 일본이 너무 더워서 열사병으로 사망자가 많이 생겼다는 뉴스까지 떴다.

가만히 있어도 땀이 주룩주룩 흐르는데 우리 일행과 원폭평화기념관 앞에 모인 일본 단체들은 각기 깃발과 현수막을 들고 아스팔트 위에서 시가행진을 시작했다.

평화기념관 앞에서 일본 내 반핵·반전 단체들과 함께 시가행진을 시작함. 사진엔 안 보이지만 경찰이 엄청 많았다.
평화기념관 앞에서 일본 내 반핵·반전 단체들과 함께 시가행진을 시작함. 사진엔 안 보이지만 경찰이 엄청 많았다.
시가행진 전 / 아직까진 뜨거운 아스팔트 위에 서기 전이다. 이 현수막이 우리 재직이가 영혼을 털려가며 지킨 것이다.
시가행진 전 / 아직까진 뜨거운 아스팔트 위에 서기 전이다. 이 현수막이 우리 재직이가 영혼을 털려가며 지킨 것이다.
시가행진 중에 전찻길을 건너기도 했다. (참고로 히로시마의 전차는 유명하다고 한다. 일본 전역에서 전차가 없어지는 추세라 더 이상 달릴 수 없게 된 전차들이 이곳에 모인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전차 모양이 제각각이다.)
시가행진 중에 전찻길을 건너기도 했다. (참고로 히로시마의 전차는 유명하다고 한다. 일본 전역에서 전차가 없어지는 추세라 더 이상 달릴 수 없게 된 전차들이 이곳에 모인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전차 모양이 제각각이다.)
시가행진을 하는 우리를 찍고 계신 현상윤 선배님의 뒷모습. 현상윤 선배님은 이번 추모제에서 공식 영상 기록을 담당하셨다. 그냥 행진만 하기도 힘든데 촬영을 위해 그야말로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셨다. 육교 아래를 지날 때 보니 어느새 현 선배님이 육교 위에서 우리를 찍고 계셨다. 너무 더운 날씨라 생수를 머리에 부어가면서 쉬지도 않고 촬영을 하셨다. (곧 나올 영상 기대합니다. 선배님.)
시가행진을 하는 우리를 찍고 계신 현상윤 선배님의 뒷모습. 현상윤 선배님은 이번 추모제에서 공식 영상 기록을 담당하셨다. 그냥 행진만 하기도 힘든데 촬영을 위해 그야말로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셨다. 육교 아래를 지날 때 보니 어느새 현 선배님이 육교 위에서 우리를 찍고 계셨다. 너무 더운 날씨라 생수를 머리에 부어가면서 쉬지도 않고 촬영을 하셨다. (곧 나올 영상 기대합니다. 선배님.)
히로시마 시내를 행진하는 우리들. 5명은 대열 안에 있고 현 선배님은 육교 위에 계신다. 우리가 든 현수막은 미국과 일본에 호소하는 내용이다. 1945년 8월에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원자폭탄에 희생된 조선인들에게 사죄하고 배상하고 명예 회복에 나서라는 것이다. 대열의 맨 앞에는 일본인 시위자가 탄 트럭이 있다.
히로시마 시내를 행진하는 우리들. 5명은 대열 안에 있고 현 선배님은 육교 위에 계신다. 우리가 든 현수막은 미국과 일본에 호소하는 내용이다. 1945년 8월에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원자폭탄에 희생된 조선인들에게 사죄하고 배상하고 명예 회복에 나서라는 것이다. 대열의 맨 앞에는 일본인 시위자가 탄 트럭이 있다.
  • 정부는 핵무기 금지조약을 비준하라(政府は核兵器禁止条約を批准せよ)
  • 비핵삼원칙을 견지하라(非核三原則を堅持しよう)
  • 전쟁 반대(戦争反対)
  • 핵없는 미래를 만들자(核のない未来をつくろう)
  • 군사기지가 없는 일본을 만들자(軍事基地のない日本をつくりましょう)
  • 원전 재가동을 멈춰라(原発再稼働を止めろ)
  • 탈핵사회를 만들자(脱核社会をつくろう)
  • 헌법 개악 반대(憲法改悪反対)
  • 평화와 인권을 지키자(平和と人権を守ろう) 라고 외쳤다.
3시간처럼 느껴지는 1시간 정도의 시가행진을 마치고 우리는 현립체육관에 들어왔다. 이곳은 '원수폭금지(원자폭탄, 수소폭탄 제조 및 사용 금지) 세계대회'가 열리는 곳이다.
3시간처럼 느껴지는 1시간 정도의 시가행진을 마치고 우리는 현립체육관에 들어왔다. 이곳은 ‘원수폭금지(원자폭탄, 수소폭탄 제조 및 사용 금지) 세계대회’가 열리는 곳이다.
우리가 보고 있는 무대. 가운데 고등학생이 치는 피아노는 81년 전에 피폭된 것이라고 한다.
우리가 보고 있는 무대. 가운데 고등학생이 치는 피아노는 81년 전에 피폭된 것이라고 한다.

우리가 보고 있는 무대다. 가운데 고등학생이 치는 피아노는 81년 전에 피폭된 것이라고 한다. 이날 원수폭 세계대회에서는 피폭자 2세인 일본인이 자신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일본 정부에서 ‘피폭자 수첩’이라는 것을 주고 무료로 치료를 받게 해줬는데 자신은 피폭자라는 걸 숨기고 싶어서 무료 치료도 거부했다고 했다.

이분은 ‘피폭자 수첩’이 하나도 달갑지 않았던 것 같은데, 이 수첩을 받고 싶어도 못 받은 사람들이 있다. 피폭 당시 히로시마에는 조선인이 8만 명 정도 있었다. 그중 5만 명이 피폭당하고 3만 명이 사망했다. 살아남은 2만 명은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의료 혜택은 하나도 받지 못했다.

1945년 8월 6일 오전 8시 15분. 미국은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떨어뜨렸다. 그때 멈춰버린 시계가 평화기념관에 전시돼 있다.

1945년 8월 6일 오전 8시 15분에 멈춰버린 시계. 평화기념관에 전시돼 있다.
1945년 8월 6일 오전 8시 15분에 멈춰버린 시계. 평화기념관에 전시돼 있다.

그날 히로시마에는 조선인이 있었다

2026년 8월 6일 오전 8시 15분. 나무 너머로 피폭된 원폭돔의 철골이 보이는 곳.
2026년 8월 6일 오전 8시 15분. 나무 너머로 피폭된 원폭돔의 철골이 보이는 곳.

2026년 8월 6일 오전 8시 15분.

나무 너머로 피폭된 원폭돔의 철골이 보이는 이곳.

우리는 81년 전 이곳 히로시마에서 핵폭탄에 희생된 조선인들을 생각했다.

그들은 이곳에서 이렇게 쓰러졌을 것이다.

‘B29’라는 과자가 있었다. 카레맛이었던 것 같은데, 그 과자를 좋아했다.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떨어뜨려 일본을 패망시킨 비행기 이름이라 더 좋아했다.

그런데 그곳에 조선인이 있었다.

당시 히로시마에 있던 조선인은 약 10만 명으로 추산된다고 한다.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강제징용으로 끌려간 노동자, 군속, 학도병, 학생들이 대부분이었고, 미Tm비시 조선소와 군수공장, 철도 건설 현장 등에서 중노동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중 원자폭탄으로 약 5만 명이 피폭되고, 3만 명 이상이 사망한 것으로 추산된다고 한다.

조선인 희생자들은 피해자 명단에 제대로 포함되지도 않았고, 유골조차 돌려받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일본 정부는 유족들에게 어떠한 배상도, 사죄도 하지 않았고, 한국 정부조차 외면해 왔다고 한다.

8월 5일 나가레가와 교회. 춤으로 조선인 희생자를 추모한다.
8월 5일 나가레가와 교회. 춤으로 조선인 희생자를 추모한다.

이곳은 다시 8월 5일 나가레가와 교회.

춤으로 조선인 희생자를 추모한다.

강제징용으로 끌려와 폭탄에 희생돼 고향에 영영 돌아가지도 못하고, 유골조차 안치되지 못한 조선인들을 생각한다.

한국에서 온 우리들은 일본 종교계, 민간인들과 함께 학을 올렸다.
한국에서 온 우리들은 일본 종교계, 민간인들과 함께 학을 올렸다.

‘사다코’라는 한 여학생이 히로시마에서 어릴 때 피폭당했다. 몸이 약했지만 그래도 초등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4학년쯤인가 피폭의 영향으로 백혈병이 생겨 학교에 가지 못하게 됐다. 사다코는 병이 낫길 기원하며 학을 접었다. 만 마리, 천 마리도 넘게 접었지만 피폭의 영향으로 결국 사다코는 사망했다. 그 이후로, 피폭자들을 추모할 때는 학을 접어 올린다. 추모제에서 한국에서 온 우리들은 일본 종교계, 민간인들과 함께 학을 올렸다.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을 부르는 재직이.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을 부르는 재직이.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을 부르는 재직이.

이별로 애끓는 마음을 온몸으로 불렀다.

교회 안에는 일본 학생들과 주민들도 많이 있었는데 처음 듣는 노래일 텐데도 모두 숙연한 모습이었다.

우리 뒤로 보이는 건물이 원폭돔이다.
우리 뒤로 보이는 건물이 원폭돔이다.

우리 뒤로 보이는 건물이 원폭돔이다. 포르투갈 사람이 설계하고 지은 거라고 한다. 겉만 남았다. 그곳은 폭탄이 터진 지점에서 160미터 정도 거리다. 폭탄은 상공 몇백 미터 위에서 터졌다고 하고 그 아래에는 현재 병원이 있다.

육자 언니
육자 언니
8월 15일 서울로 온 육자 언니와 일본 측 대표들.
8월 15일 서울로 온 육자 언니와 일본 측 대표들.

8월 4일 히로시마에서 첫 끼니로 오코노미야키를 먹을 때였다.

나, 재직이, 태혁 선배와 한 테이블이었는데, 현지에서 합류한 한 남자가 우리 테이블에 앉게 됐다. 일본말을 하면서 우리 주문을 도와주길래 가이드인 줄 알았다.

알고 보니 재일교포 3세였다.‘한통련’이라고 불리는 ‘재일한국민주통일연합’ 소속이었다. 이번 추모제를 위해 일본 현지에서 한통련이 통역을 도맡아 하는 것은 물론이고 한국에서 온 24명의 길 안내까지 담당했다. 현지에서 우리 24명이 갈 식당도 알아봐 주셨고(일본에는 큰 식당이 별로 없는 것 같았다), 일본 내 반핵집 회와 뜻을 같이하는 일본인들과의 교류회에 참가할 수 있도록 도와주셨다. 도쿄나 오사카 등지에서 자비를 들여 일부러 와준 거였다.

우리의 고마운 마음을 그에게 전달하고 있을 때,

식당 안쪽에 앉았던 현 선배님과 중원 선배님, 봉열 선배님이 흥분하며 우리에게 왔다. “여기 외대 나온 사람이 있어! 외민동 가입하기로 했다.”

한통련과 같이 온 재일동포 중에 한국어교육학과에 2006년도에 편입한 언니가 있었다. 나이는 봉열 선배랑 같았다. 정육자 언니다.

“내 꿈은 내 나라에서 태어나는 거야”

언니는 일본에서 태어난 재일교포 3세다.

차별 때문에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는 그 누구보다도 일본인처럼 살았다고 한다.

그러나 완고한 아버지의 반대로 대학에 들어가지 못하면서부터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생겼다고 한다. 그때부터 한글을 배우기 시작했다. 한국 역사에 관심도 가지게 됐다. 정치는 말할 것도 없다. 국적도 대한민국이고 대한민국 여권이 있지만 선거권을 갖게 된 것이 10여 년이 안 됐다고 한다. 육자 언니가 처음으로 투표라는 걸 해본 건, 한국에 와서 외대에 다닐 때 학생회 선거를 할 때였다고 한다.

내 나라가 아닌 곳에서 살기 때문에 받는 차별은 이제는 조금은 덜해졌다고 한다. 한류 때문이다. 언니는 도쿄의 한 대학에서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다.

언니는 외민동에 들며 1년 치 회비를 선납했다.

외민동은 6명으로 떠났지만 일본에서 7명이 됐다.

중원 선배가 올해 5·18 광주 기행 기념품으로 받은 가방에 달린 외민동 홀로그램 키링을 육자 언니에게 기념으로 주셨다. 봉열 선배는 가방에 있던 외민동 보조배터리를 주셨다.

언니는 8월 15일 ‘자주평화 전진대회’에 참석차 서울로 왔다.

가방엔 외민동 홀로그램 키링을 달았다.

원폭돔이 있는 평화기념공원에는 원폭 피해자와 사망자를 기리는 공양탑, 위령비, 시비(詩碑) 등등이 있다. 주로 일본인들을 위한 것인데, 1970년 4월에는 재일교포들이 세운 조선인 희생자들을 위한 위령비도 세워졌다. 이 위령비도 대한민국 정부가 세운 것은 아니다.

8월 6일 오후 5시 30분쯤. 우리 일행은 추모제 준비위원회에서 소개해준 재일교포 3세 남성의 설명을 들으며 평화기념공원을 둘러봤다. 이분은 경상도가 고향이신 할아버지가 일제강점기 때 이주를 해서, 대대로 히로시마에 살고 있다고 했다. 피폭된 지점하고는 멀리 떨어진 곳에 살아서 다행히 피해를 보진 않았다고 한다.

너무 더운 날씨에 공원이 넓어서 점점 기운을 잃어가는 우리를 보며 그분이 제안을 하나 했다. “혹시 여력이 되면 꼭 소개하고 싶은 게 있다. 근데 좀 멀다. 가보겠냐?”

땀을 뻘뻘 흘리며 바쁜 시간을 쪼개 가이드를 해주러 오신 분도 있는데, 우리는 힘을 내서 따라가 봤다.

그분은 우리를 공원의 가장자리에 있는 주차장으로 데리고 갔다.

주차장의 가장 끝에 길지 않은 쇠파이프 같은 것이 세워져 있었다. 꼭대기에는 동그란 것이 달려 있다.

그분은 이게 시계탑이라고 했다. 시계는 주차장 밖에서 보이도록 돼 있는데 시계탑에 대한 짤막한 설명은 주차장 안에 있었다.

‘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国帰国記念

広島県在留朝鮮人帰国者 1959年12月14日’ 라고 쓰여 있다.

우리말로 옮기자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귀국 기념 / 히로시마현 재류 조선인 귀국자 / 1959년 12월 14일’이다.

1959년 12월 14일에 히로시마현에 살던 조선인들이 북한 귀국을 기념해서 히로시마에 기증한 시계탑이라는 거다. 이 시계는 처음에는 현재의 국제회의장인 히로시마 시 공회당 남쪽 녹지대에 세워졌다가, 평화기념공원이 정비되면서 현재 위치로 옮겨졌다고 한다. 눈에 띄지 않는 이곳으로… 왜 이렇게 됐을까….

시계탑의 후면. 주차장 안쪽에서 본 모습이다.
시계탑의 후면. 주차장 안쪽에서 본 모습이다.
시계탑의 앞면. 시각이 맞지 않다.
시계탑의 앞면. 시각이 맞지 않다.

이번에 추모제에 참가하면서 알게 된 이야기인데,

미국이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떨어뜨린 것이 당시 냉전의 라이벌이었던 소련보다 앞서 개발한 이 무기의 살상력을 실험, 과시하려는 목적도 있었다는 것이다. 그 힘자랑과 자리 싸움에 군인도 아니었던 14만 명이 희생됐다. 엄청나게 뜨거운 온도에 그 자리에서 타 버리거나 살이 녹아 버렸다. 운 좋게 살았어도 온몸에 종양이 생겼으며 평생 각종 병에 시달려야 했다. 피폭은 2세와 3세까지 이어져 백혈병, 지적장애 등 온갖 질병으로 나타나고 있다.

우리는 1945년 해방됐고 미국과 소련에 의해 분단됐다.

미국과 소련은 각자의 힘의 균형을 위해 일본이 전범국가임에도 그에 대한 합당한 죗값을 치르지 않게 했다.

강제징집, 일본군 성노예 등 식민통치에서 벌어진 온갖 악행에 대한 사죄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피폭된 조선인에 대한 사죄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평화기념공원 안에는 ‘원폭 피해자 공양탑’이 있다.

폭심지에서 가까워, 피폭 직후 수습되지 못한 이 일대의 시신들을 옮겨 화장하던 곳에 만들었다. 내부 납골당에는 신원이 확인되지 않았거나 연고를 찾지 못한 유골 약 7만 위가 모셔져 있다. 히로시마시는 매년 신원이 확인된 무연고 유골 명단을 공개해 유족을 찾고 있다.

그 안에 우리 조선인들이 있을 수 있다.

1945년 8월 6일 8시 15분 폭탄이 떨어질 때,

눈을 떠도 감아도 살았어도 죽은 것 같은 시간을 보내며 고향을 그리워했을 조선인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그들의 이름과 고향을 찾아드려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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