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이 기억하는 아버지

― 아버지 박창희 교수 1주기 추모 심포지엄에 부쳐

Picture of 박재혁

박재혁

고 박창희 교수 막내아들, 스웨덴어과 91

지난 7월 7일, 한국외대 이문동 캠퍼스에서 아버지 박창희 교수의 1주기 추모 심포지엄이 열렸습니다. ‘역사와 함께 민족과 더불어’를 주제로 1부 학술대회에서 아버지의 민족문제 인식과 역사관, 세종 연구, 고려사 연구, 국민학교 개명운동 같은 학문적 성과를 짚었고, 2부 라운드테이블에서는 제자와 동료, 국내외 연구자들이 아버지와의 인연을 되짚었다고 합니다. 제자분들을 비롯해 여든 분 넘게 자리를 채워주셨다지요. 외민동에서도 많은 분들이 와주셨다고 들었습니다.

심포지엄 안내 화면
발표와 토론
2부 라운드테이블

저는 호주에 있어 그 자리에 가지 못했습니다. 누나 박정아(영어과83)가 전해준 이야기로 그날을 짐작할 뿐이었습니다. 김종찬 회장님께서 “추모가 추모로만 끝나서는 안 될 것 같다”고 하셨다는 대목에서는 한참 마음이 머물렀습니다.

가지 못한 자리에 참가 후기를 쓰려니 조금 쑥스럽습니다. 그래도 아버지 1주기에 가만히 있기는 뭐해서, 그날 그 자리에 있었다면 형님들과 나눴을 이야기를 대신 적어봅니다. 한국에서 시간을 함께할 수 있다면 이런저런 이야기로 나눌 것들인데, 이번에 함께하지 못하니 글만 몇 자 바다 건너로 보냅니다.

무심하고, 옳고, 착하고, 순한

저에게 아버지는 엄한 분은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다정다감한 분도 아니었고요.

어찌 보면 무심한 아버지. 옳은 아버지. 착한 아버지. 순한 아버지. 유머러스한 아버지, 바쁜 아버지, 술 잘 드시는 아버지, 두루마기가 잘 어울리는 아버지, ‘추풍령’ 같은 아무도 모르고 혼자만 아시는 노래를 부르시는 아버지, 다들 아는 노래인데도 내가 아는 그 노래인지 쉽게 알아차리지 못하게 부르시는 아버지….

뭐, 그런 아버지였습니다.

저는 아버지와 마흔 살 차이가 나는 막내아들입니다. 정확히는 서른아홉 살 차이인데, 어릴 때 아버지에게 맞은 기억도 혼난 기억도 없습니다. 처음 혼난 게 재수할 때 담배를 들켜서였던 것 같습니다.

취미가 등산이었던 초등학생

탈반 형님들이 기억하시는 꼬마였을 때, 저는 아버지를 참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새벽에 조깅을 나가실 때 따라나서서 해 뜨기 전 잠실철교를 쫄래쫄래 쫓아 뛰었고, 산을 좋아하시는 아버지를 따라 북한산, 불암산, 수락산, 도봉산에 다녔습니다.

초등학교에 다닐 때 학급에서 학생들에 대한 조사를 한 적이 있습니다. 부모 학력, 취미, 특기 같은 것들을 써내는 조사였지요. 저는 취미란에 등산이라고 썼습니다. 초등학교 4, 5학년이 혼자 가지도 못하는 등산을 취미로 써낸다는 것이 지금 생각하면 우스운 이야기인데, 그때는 제 취미가 등산인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를 따라다니고 싶어서 등산을 많이 했으니까요.

사실 저는 새벽 조깅도 등산도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아버지와 시간을 함께하고 싶어서 따라다녔지요.

좋아하지도 않는 산에 아버지를 따라갔을 때 초등학생이던 저에게 노래를 시키던 형님도 기억납니다. 부끄럼 많고 정말 내성적이었던 저에게, 산도 별로 안 좋아하는데 많은 사람들 앞에서 노래라니…. 그때 노래를 시키던 태호 형님의 얼굴과 목소리가 아직도 선합니다. 특유의 굵은 목소리로 “재혁이 노래 한번 해봐라” 하시던…. 그걸 저는 또 했더랬습니다. 어릴 때 워낙 어른들 말씀 잘 듣던 순종형 어린이여서였는지, 아버지를 실망시키기 싫어서였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저는 아버지와 몇몇 형님들 앞에서 노래를 했고, 그때 부른 노래를 아직도 기억합니다.

바로 옆으로 등산객들이 지나다니는데 대학생 형님들이 어린 초등학생에게 노래를 시키다니요. 그런데 저는 막걸리 한잔 안 마시고 노래를 했더랬습니다. 아버지는 그저 옆에서 가만히 계셨고요. 미소를 지으셨던가…?

저는 사실 야구, 축구, 배구 같은 공놀이를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저와 한 번도 공을 가지고 놀아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저 조깅, 등산 그런 것들만 하셨고 저는 그런 아버지를 따라다녔지요. 그러던 어느 해인가 아버지는 외대 교직원 축구팀에 가입해 축구를 하셨습니다. 수비수였는데 주변에서 베켄바워라고 칭찬한다며 좋아하시면서 저한테 자랑을 하시곤 했습니다. 저와는 한 번도 같이 공을 차주신 적 없던 아버지….

그때 배신감을 느꼈는지 베켄바워가 누구인지 궁금해했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습니다.

계란 기름과 아버지의 등

아주 어릴 때 군것질을 많이 했던 저는 충치가 많았습니다. 초등학교 3, 4학년이 되자 충치가 심하게 썩어서 치통이 몹시 심했습니다. 어린 저는 통증을 참을 수 없어 징징대며 많이 울었습니다.

아버지는 그 어린 저에게 이상한 약을 만들어 물고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계란을 태우고 또 태우면 새까만 기름이 나오는데 거기에 마취 성분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지금이야 그냥 나이에 맞는 진통제를 먹이면 되지 않았을까 싶지만, 그때는 너무 아파서 그저 아버지의 처방만을 기다렸던 것 같습니다.

어린 저는 울고 있는데 아버지는 30분인지 40분인지 지독한 냄새를 풍기며 계란 기름을 만드셨습니다. 그리고는 솜에 묻혀 물고 있으라고…. 토할 것 같은 역겨운 냄새였는데 그래도 물고 있었습니다. 통증 때문에 운 건지, 역겨운 냄새를 참느라 힘들어서 운 건지, 그것 또한 이제는 잘 모르겠습니다.

어찌 됐든 계란 기름 묻힌 솜을 물고 아버지에게 업혀 징징대며 울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 아버지의 등은 넓고 단단했습니다. 자식은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고 자란다고 하지요. 저는 아버지의 등을 기억합니다.

한강변 밭, 그리고 “마, 됐다”

어릴 때 살던 장미아파트는 한강 바로 옆에 있었습니다. 아파트 복도에 서면 강변대로(그때는 88올림픽대로가 만들어지기 전이었네요)와 한강이 시원하게 보였지요. 그때 한강변은 정비되기 전이라 자연 그대로였습니다. 갈대밭이었고, 모래밭이었고, 자갈밭이었고….

처음 시작이 4학년 때였는지 5학년 때였는지 모르겠는데, 아버지는 한강변에 밭을 일구기 시작했습니다. 한강변에 살던 아파트 주민들이 삽이며 곡괭이를 들고 위험천만하게도 강변대로를 무단횡단해 한강변을 개간하고는 무, 배추, 쑥갓, 파, 시금치, 알타리 같은 온갖 채소 농사를 지었습니다. 주인 없는 땅이라 누구든 제 노동력으로 삽질하고 곡괭이질해 개간하면 자기 땅이었습니다.

아버지와 형과 저, 세 부자가 열심히 농사를 지었습니다. 워낙 힘이 약하고 여리여리했던 저에게는 힘에 부치는 일이었습니다. 그래도 아버지와 같이 땀 흘리고, 같이 목숨 걸고 무단횡단하고, 같이 수확하는 그 모든 것이 아버지와 함께한다는 것 때문에 좋았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했지요. 그러다 보니 어느새 한강변의 다른 밭들보다 우리 밭이 제일 넓을 정도로 커졌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는 새로운 작물을 심자며 땅을 조금 더 개간하셨습니다. 또 삽질하고 곡괭이질하고 돌 치우고 밭이랑 만들고… 예쁘게 개간을 했습니다. 아버지께서 “내일 와서 여기다 씨 뿌리자”라고 하셨습니다. 그때 뭘 심자고 하셨는지, 그건 기억이 잘 나지 않네요.

다음 날 씨를 뿌리러 아버지와 또 무단횡단을 해서 한강변에 갔습니다. 새로 개간한 우리 밭에 갔더니 어제 예쁘게 만들어 놓은 그 밭에 웬 할머니가 쪼그리고 앉아 씨를 뿌리고 있었지요.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를 쳐다봤습니다. “여긴 제 아이들이 만든 밭입니다” 하고 할머니를 쫓아주시기를 바라는 눈빛이었을 겁니다. 아버지는 그 할머니를 보고 계셨습니다. 잠시 보시던 아버지는 저에게 한마디 하시더군요.

“마, 됐다.”

그리고는 제 등을 톡톡 어루만지시며 뒤돌아 오셨습니다. 이름 모를 그 할머니는 농사 잘 지으시다가 이제는 돌아가셨겠지요?

“그때 우리나라에 뭐가 필요하겠노”

저는 어릴 때 외대가 제일 좋은 학교인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 직장이 외대였고 맨날 오는 형들이 외대생이다 보니 외대는 이미 제 삶 속에 깊이 들어와 있었지요. 아버지 직장이 서울대였고 만날 오는 형들이 서울대생이었으면 제가 서울대에 갔을까요? 음…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여하튼 저는 고3 때 외대에 지원했고 떨어졌습니다. 그리고 재수를 했지요. 재수를 하니 삼수는 싫어서 커트라인을 낮춰 지원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학교는 이미 정해져 있었지요. 외대.

교직원 자녀 등록금 지원 혜택이 있는 외대. 학교를 정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습니다. 저에게 외대는 원래 다니던 학교 같은 느낌이었으니까요. 문제는 전공이었습니다. 비슷비슷한 커트라인의 과들 중에 하나를 골라야 했는데 좀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께 여쭤봤습니다.

아버지는 이래라저래라 하신 적이 없었습니다. 어떨 때는 그래서 더 힘들기도 했지만, 어쨌든 아버지는 이래라저래라 하신 적이 없었습니다. 전공을 고르는 중에도 아버지는 이래라저래라 하지 않고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네가 공부를 마치고 졸업해서 사회에 나가 일을 하게 될 때가 되면 그래도 우리나라가 통일에 가깝거나 하지 않겠나. 그럼 그때 우리나라에 뭐가 필요하겠노. 그때 필요한 공부를 하는 게 어떻겠노….”

어려웠습니다.

대학 4년, 군대 3년, 어쩌면 대학원 2년, 어쩌면 박사과정. 나는 도대체 몇 년을 공부하게 될까. 혼자 이런저런 계산을 하다가, 어쨌든 통일 이후에는 우리나라에도 사회복지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어 스웨덴을 배워보자고 결론을 내렸지요.

나중에 생각했습니다.

‘아, 아버지의 말씀이 나에게는 너무 어려웠다. 꿈이 너무 원대했다….’

그렇게 저의 전공 선택은 저도 몰랐고 아버지도 모르셨던 저의 뇌 구조, 논리 구조 탓에 고난의 길이 되고 말았습니다. 비록 그때의 선택이 대학 공부를 힘들게 하긴 했지만, 아버지가 제시하신 선택의 기준은 지금도 늘 저를 따라다니고 있네요. 쉬운 기준은 아니지만 무언가를 결정하고 선택해야 할 때 아버지의 기준을 한 번은 더 생각하게 됩니다.

대학 전공을 고를 때 아버지가 제시하신 기준을 제 나름대로 정리하며 배운 것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좀 더 근본적인 문제를 선택의 기준으로 세운다.’

‘좀 더 공익적인 문제를 선택의 기준으로 세운다.’

그런 기준으로 살아가면 나름 옳다고 생각되고 멋도 있는데, 부작용은 인생이 좀 힘들어진다는 것 같습니다.

제자·동료들의 회고
심포지엄에 참석한 동문들
청중 발언

추억보다는 기억

살면서 이런저런 기억의 조각들을 하나씩 꺼내 볼 때가 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저는 아버지에 대한 추억보다 기억이 많은 듯합니다. 비슷한 말인 것 같습니다만 어떻게 정리해야 할까요. 추억과 기억은 뭔가 다른 느낌입니다. 그 다른 느낌을 대입하자면, 저는 아버지를 추억하는 것보다 기억하는 것이 더 많은 듯합니다.

기억이 됐든 추억이 됐든 제 몸에, 마음에, 생각에 아버지가 많이 배어 있습니다. 머리가 기억하고 몸이 기억합니다. 아침에 일어나 거울을 보면 인정을 안 하려야 안 할 수가 없더군요.

항상 새벽에 일찍 일어나시는 아버지를 보고 자랐더니 저도 새벽에 일어나는 것이 어렵지 않습니다. 덕택에 외국에 와서 정착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되었지요. 특별히 생각하고 계획하고 결심해서 의지적으로 살지 않고 그냥 그냥 살아도, 아버지의 모습이 순간순간 저에게서 스며 나옵니다.

그렇게 스며들어 있는 것이 좋습니다

영화나 드라마에 “아버지처럼 살지 않을 거야”, “엄마처럼 살지 않을 거야” 하는 대사가 종종 나옵니다. 다행히 저는 그런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아버지처럼 살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다만 알게 모르게 저에게서 스며 나올 아버지의 모습이 좋습니다. 아버지가 저에게 무엇을 가르쳐주셨는지 명문화해서 이야기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냥 몸에 밴 대로 살려고 합니다.

저도 이제 아버지가 되어 그때의 아버지처럼 아이들을 키우고 있습니다. 제가 호주에 온 이후 아버지가 처음으로 호주에 방문하셨을 때 여쭤본 적이 있습니다.

“아버지, 진성이에게 꼭 이어지게 하고 싶은 것이 있으세요?”

많은 말씀을 하셨는데 역시나 정리하기 어려웠습니다. 아버지 말씀은 한 줄 요약이 어려운 경우가 아주 많습니다.

어쨌든 저는 아버지의 마음을 알기에, 제 아이들에게 아버지가 저에게 하셨던 것처럼 하는 것도 있고 안 하는 것도 있습니다. 하고 싶어도 안 되는 것도 있고, 하기 싫은데 어쩔 수 없이 되는 것도 있습니다. 그냥 그렇게 아버지는 저에게, 제 아이들에게 스며들어 있습니다.

그게 마음을 따뜻하게도 하고 편안하게도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스며들어 있는 것이 좋습니다.

행사장 앞에서
행사장 앞에서
아버지의 사진 앞에서

※ 심포지엄은 유튜브에서 다시 볼 수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QnTNvdWbhnE

답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