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1

특별기고 1

선배님, 저는 지금 밥을 지키는 전선에 서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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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나

전국농민회총연맹 정책위원장, 신방과 98학번

외대민주동문회 선배님의 연락을 받고 한참을 망설였습니다. 각자의 자리에서 시대의 고랑을 일궈온 분들 앞에 제 투박한 손바닥을 내보이는 것이 부끄럽기도 했고, 한편으론 든든한 울타리를 만난 듯 반가웠기 때문입니다.

저를 이 길로 이끈 씨앗은 이문동 캠퍼스에서 뿌려졌습니다. 우리는 사회가 왜 불평등한지, 어떻게 바꿀 수 있는지를 고민했고, 세상은 결국 사람의 선택으로 변한다는 믿음을 배웠습니다. 최근 외대민주동문회를 통해 다시 만난 선배님들의 모습 속에서 저는 운동이 특정한 시기의 경험이 아니라 삶의 태도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저는 일산에 있습니다. 기후위기 대응 방안을 논의하는 국회 의제숙의단 워크숍이 열리고 있습니다. 2024년 8월 헌법재판소가 탄소중립기본법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린 이후, 법 개정을 위해 사회 각 분야가 모여 논의하는 자리입니다. 전국농민회총연맹 정책위원장으로서 이제 저는 농업만이 아니라 기후, 에너지, 식량, 지역사회까지 연결된 문제를 함께 고민해야 하는 위치에 서 있습니다. 그 책임의 무게가 크게 느껴지는 시간들입니다.

농활, 풍경 너머의 농민을 만난 시간

저는 농촌에서 태어나 자랐습니다. 논과 밭, 마을의 일상은 늘 곁에 있던 익숙한 풍경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서 살아가는 농민들의 삶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거 같습니다.

외대 농활에서 다시 만난 농촌은 그래서 새로웠습니다. 낮에는 함께 밭에 나가 풀을 뽑고 삽질을 하며 땀을 흘렸고, 익숙하지 않은 노동에 지친 농활대원들은 밤이 되면 피곤한 몸을 이끌고 농촌을 이해하기 위한 세미나를 이어갔습니다. 마을 사람들과 가까워지고 싶다며 직접 음식을 만들고 노래를 부르던 모습도 기억에 남습니다.

생명을 함부로 죽이면 안 된다고 말하던 후배가 농활을 시작한 지 하루도 지나지 않아 반사적으로 벌레를 잡던 모습, 막걸리를 마신 뒤 밭 한가운데를 안방처럼 여기며 신발을 벗어놓고 편안하게 잠들어 있던 모습은 지금도 선명합니다. 서툴지만 진심으로 농촌에 다가가려 했던 우리의 시간이었습니다.

그 시간 속에서 저는 처음으로 농민의 삶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같은 농촌에서 살아왔지만 농업을 삶의 문제로 고민하며 살아가는 농민회 분들은 제가 알던 것과 전혀 다른 세계였습니다. 논과 밭이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사람들의 노동과 선택, 그리고 사회와 연결된 삶의 자리로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그때 처음으로 ‘농촌’이 아니라 ‘농민’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때 만난 농민회 형님들이 이제는 동지로 함께 활동하고 있습니다.

들깨 농사와 공동체, 그리고 현실의 벽

대학을 졸업한 뒤 저는 다시 농촌으로 돌아와 농민회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그때의 농민운동은 권리를 되찾기 위해 구호를 외치는 일이기도 했지만, 대안을 만들어 보겠다는 결심도 생겼습니다.

농사는 함께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농민들이 지역에서 함께 해볼 수 있는 일을 찾기 시작했고, 동네 누구나 짓고 있던 들깨를 작목으로 삼아 무언가를 해보게 되었습니다.

씨를 뿌리고 수확 시기를 맞추며 서로의 밭을 오가다 보니 공동체가 만들어졌습니다. 그리고 더 나은 소득, 더 나은 판로를 위해 들깨를 들기름으로 가공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에는 젊다는 이유로 자연스럽게 제가 앞에 서게 되었고, 그렇게 얼떨결에 총대를 메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공동체의 일이었지만 어느 순간 그것은 제 삶의 일이 되었고, 결국 제 농사가 되었습니다.

37년 만의 여성 임원, 설익은용기에 대하여

전국농민회총연맹 정책위원장을 맡게 되었고, 전농 37년 역사상 첫 여성 임원이라는 수식어가 붙었습니다. 이것은 새로운 농민운동에 대한 기대의 반영이라고 생각합니다.

주변에서는 저 개인에 대한 걱정도 많이 해주십니다. 지금까지 해오던 사업은 어떻게 할 것이냐, 아이들이 아직 어린데 서울 생활은 괜찮겠느냐는 이야기들이 이어졌습니다. 저 역시 같은 고민을 했습니다. 지금도 개인적인 어려움은 여전히 존재합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어차피 한번 해야 할 일이라면, 조금이라도 젊을 때 맡는 게 낫겠다는 마음이었습니다. 젊을 때는 부족해도 이해를 받을 수 있고, 실수하더라도 다시 배울 시간이 있으니까요. 그래서 그냥 한번 해보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농민운동은 그렇게 녹록하지 않습니다.

전농의 100개 시군농민회 가운데 약 70%는 지역 소멸 위기 농촌이 근거지입니다. 농민들은 빠르게 고령화되고 있고, 농촌은 소멸의 문턱에 서 있으며, 그 자리를 이어갈 후대 활동가는 좀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희망을 쉽게 말하기 어려운 현실이라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전농의 지역 농민회를 지키고 있는 활동가들의 대부분은 이미 30년, 40년 이상 농민운동을 해왔습니다. 그러면서 이제는 “난 할 만큼 했어. 이젠 그만할래”라는 말을 하는 일도 많아졌습니다. 그러면 또 옆에서 “농민회 활동은 70부터야.” 라고 말합니다. 농담처럼 들리지만, 전농의 사활이 걸린 말이기도 합니다. 70대 농민들이 주축이 되지 않으면 농민운동을 할 사람이 없기 때문이지요.

“사람도 잘 죽는 게 중요하잖어. 우리도 문을 닫더라도 끝까지는 해봐야지.”

비장한 말이 아니라, 막걸리 자리에서 툭 던지듯 나왔던 말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말이 오래 마음에 남았습니다. 제가 전농 정책위원장을 맡기로 결심하게 된 것도 그 말 때문이었던 거 같습니다. 결과를 장담할 수 없어도, 누군가는 지금 해야 할 일을 해야 한다는 마음이었습니다.

농민운동은 그렇게, 희망이 분명하게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도 농담처럼 건네는 결의 속에서 이어지고 있습니다.

죽을 자리를 만들 듯, 농민회를 지키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희망

농민의 소득은 밑바닥을 치고, 일구던 땅과 사람의 숫자는 해마다 눈에 띄게 줄어듭니다. 농업 예산은 가물어 가는데 수입 농산물은 홍수처럼 밀려오고, 예상치 못한 기후재앙은 피땀 어린 농사를 한순간에 쑥대밭으로 만듭니다. 세상은 눈부시게 발전했다지만, 농민의 삶은 오히려 시곗바늘이 거꾸로 돌아갑니다.

전농의 트랙터 투쟁과 백남기 농민의 죽음은 쌀값을 똥값으로 만들었던 박근혜 정권을 광장에서 끌어내렸습니다. 하지만 농민의 삶에 찾아온 것은 이전보다 더 참담한 쌀값 폭락이었습니다. 윤석열 정권이 무너진 뒤에도 상황은 다르지 않습니다. “농사를 계속 짓는 것은 미래 세대에 죄를 짓는 일”이라며 농민의 가슴에 대못을 박았던 이들은 여전히 권력의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정권의 옷 색깔은 바뀌어도 농업은 늘 뒷전이었고, 농민은 번번이 배신의 쓴잔을 마셔야 했습니다.

정직하게 일해도 생산비조차 건지기 힘든 현실이 반복되는 것도 서럽지만, 더 아픈 것은 농민을 향하던 최소한의 존중과 감사마저 사라진 시대의 차가운 시선입니다. 도시의 화려한 일상은 농촌의 희생을 양분 삼아 유지되면서도, 농촌의 고통은 너무나 쉽게 잊히거나 지워집니다.

도시에서 배출한 쓰레기는 농촌의 산야로 향하고, 도시의 불을 밝히기 위해 들녘 곳곳에는 거대한 고압 송전탑이 박힙니다. 공장의 굴뚝에서 뿜어져 나온 연기는 기후재난이라는 부메랑이 되어 다시 농민의 밭을 덮칩니다. 농민은 언제나 가장 먼저 피해를 입지만, 권리의 목록에서는 가장 나중에 불리는 존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농업과 농촌을 지키려 발버둥치는 농민 동지들과 함께 걷습니다.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사람은 결국 먹어야 살고, 밥을 짓는 신성한 노동은 결코 멈출 수 없기 때문입니다. 씨앗을 뿌려야만 수확할 수 있다는 그 단순하고도 엄중한 진리가 저를 지탱합니다. 끝까지 남아 농업을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마치 본인의 죽을 자리를 스스로 마련하듯 땅을 떠나지 않는 동지들 곁에 있습니다. 그 거칠고 단단한 손들을 잡고 함께 싸우고 살아가는 이 자리가 저에게는 무엇보다 큰 영광입니다.

무엇보다 우리 늙은 농민들은 외로운 길 위에서 다시 희망의 불씨를 발견합니다. 매서운 칼바람이 몰아치던 남태령 고갯길에서, 우리와 함께 추위를 견디며 손을 맞잡아주었던 시민들의 온기를 기억합니다. 팥죽을 쑤어 텀블러에 담아 농민분들과 나눠 먹으라고 건네주시던 외민동 선배님들도 기억합니다.

국민과 함께 민주주의를 지킬 수 있는 자리를 농민에게 내어주신 그 마음들을 이정표 삼아, 굽이진 이 길을 끝까지 걸어가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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