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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어과 83
나는 약초꾼이다.
거의 매일같이 이 산 저 산, 이 골짜기 저 골짜기를 오르내리며 온갖 산약초를 찾아 돌아다니는 것이 일상이다 보니 뼛속까지 약초꾼이라 할 것이다.
당연히 채취해 온 산나물이나 약초 그리고 버섯 등을 팔아 생계를 꾸려나간다. 20여 년이 넘도록 이 일을 해 오면서도 생활은 늘 약초꾼의 두 다리만큼이나 퍽퍽하기만 하지만, 여전히 산속 방랑을 즐긴다. 내려놓지만 않는다면 정년도 없고 누구의 간섭도 없는 방랑의 약초꾼으로 살아가는 선물 같은 하루하루가 좋기만 하다!
가난이 빚어낸 삶
어려서는 집안이 지독하게 가난한 데다 바닷가에 살다 보니, 어머니와 함께 자루 몇 개와 호미 하나 들고 갯벌에 나가 온갖 종류의 조개를 긁어모아 자루에 담아 장에 나가 내다 팔기도 했다. 아버지가 도지로 얻은 밭에 심은 부추(솔)를 단으로 엮어 시내 식당을 찾아다니며 팔던 일, 전기가 없어 비싼 양초는 제사 때에나 켤 수 있었고 대신 등잔대를 깎아 쓰던 기억, 지게와 갈퀴를 지고 야산에 올라 마른 솔가지와 솔잎을 긁어 단단히 묶어 지게에 지고 내려와 땔감으로 팔던 일, 중학교 2학년 추수철에 논에 나가 나락 가마니를 나르던 일…들이 떠오른다.
선친께서는 가까운 동네는 물론 멀리 있는 동네까지 상이 나면 망자의 시신을 수습하고 수의를 입히는 염을 잘 하셨고, 특히 상여 나가는 길 뒤따르는 오색의 만장들 속 글귀도 잘 쓰셨다. 이런 연유로 한문을 자연스럽게 익히게 되었는데, 어느 날 우연히 지관이셨던 친구 아버지의 낙점으로 지관을 따라 집터나 묫자리를 보러 다니면서 어린 나이임에도 어설프게나마 풍수와 인간의 삶과 죽음, 길흉화복에 대한 수많은 경험과 생각을 하기도 했다.
돌아보면 이 어린 시절의 지독하리만큼 서글픈 일들이 주체할 수 없을 때도 있지만, 결코 지워버리고 싶지는 않다. 가끔 새록새록 떠오르는 기억들이 지금의 비루한 약초꾼을 울컥하게 할 때도 있지만, 그 인고의 세월을 살아내셨던 어머니에 대한 아름다운 기억을 해낼 수 있어 참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나이 40 언저리에 겪었던 경제적·신체적 변고가 없었다 하더라도, 지금의 생활은 이미 필연이 되어 드라마틱하게 예정되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길 없는 길을 걷는다
어쩌다 사람들은 내게 이렇게 묻곤 한다. “날마다 산에 오르내리니 산을 잘 타시겠어요?” 대수롭지는 않지만 사실 이런 물음이 탐탁지는 않다. 등산복도 등산화도 없거니와 그 오랜 세월 동안 원색의 등산복을 차려입고 일행들과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며 산 정상에 표지석 옆에서 기념사진을 찍은 것은 서른 이전의 이야기일 뿐이기 때문이다. 소위 정해진 길을 따라 가는 등산이라면, 용대리 백담계곡에서 대청봉까지 단숨에 달리거나 호기롭게 서울에서 속초까지 걸어가 대포항 갯바위 위에 걸터앉아 마늘장아찌에 깡소주를 벌컥벌컥하던 그 시절의 이야기이다.
지금의 약초꾼은 아무 옷이나 걸치고 아무 신발이나 신고, 걸망 속에 괭이 한 자루, 가위 하나, 물 한 병과 막걸리 한 병을 갈무리 한 후 산으로 향한다. 대략의 행선지와 방향은 정하고 가지만 산에 들어 갈 때부터 나올 때가지 길 없는 길! 내딛는 발걸음이 길을 내면서 다닌다. 방향도 없고 골짜기고 벼랑이고 어디든 두발 아니 네발로라도 갈 수 있는 곳이라면 가리지 않는다. 그 무엇도 두렵지 않거니와 오히려 즐겁기 때문이다. 배고픈 것 또한 잘 참으니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애써 따로 챙겨갈 음식이 필요하지도 않다. 허기지거나 갈증이 나면 적당한 풀뿌리를 캐 먹거나 나뭇잎을 따 먹으면 어느 정도는 해결이 된다. 적당히 아늑한 곳에 아름드리 나뭇등걸에 기대 앉아 새소리, 나뭇잎 부딪치는 소리, 실바람 소리, 그리고 고요함 속에서 마시는 막걸리 한 잔의 맛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도, 양보할 수도 없는 약초꾼 최고의 재산이자 낭만이며 호사다. 방향도 목적지도 없으니 산은 ‘타는’ 게 아니라 그냥 ‘노니는’ 것이라고!
“아주 오랫동안 산에 다녀 보았으니 거의 모르는 게 없겠네요?” 오래 다녔으니 보통 사람들 보다 많이 아는 게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깨달았다. 숲을 이루고 그 속에 살아가는 나무와 들짐승 날짐승, 산나물과 약초, 야생초, 곤충과 벌레들, 셀 수 없이 많은 생명체들과 그 안에서 일어나는 변화무쌍한 자연의 섭리를 기계처럼 알아 가기에는 우리네 인생이 그리 길지 않다는 것을. 부끄럽지만 약초꾼이 아는 것도 그 양으로 치자면 명사십리 백사장의 모래알 두세 개 정도일 것이다. 약초꾼의 대답은 이렇다.
“하나라도 더 많이 알면 좋겠지만 그보다는 숲속에 많이 들어가서 어느 야생초가 어떻게 겨울을 나고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고 번식을 하며,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음식과 약이 되어 내어주는 지를 느껴 보시라. 이것이 참된 앎이요, 자연과 숲을 사랑하는 구성원으로서 최소한의 자격이다! 많이 알려고 하지 말고 많이 보라!”
계절마다 산이 내어주는 것들
“나물의 계절인 약초와 버섯의 계절인 가을은 바삐 돌아다니실 테고 그러면 여름과 겨울은 뭐 하면서 지내시나요?” 그러게, 마땅히 대답할 말이 없다! 이럴 즈음 달콤한 유혹의 손이 다가오기도 한다. 프로 운동선수들을 대상으로 장사(?)를 하는 여러 업자들 중 뱀탕을 취급하는 사람이 찾아와, 독사를 잡아오면 무조건 한 마리당 10만 원 이상 지불하고 사 주겠다는 것이다. 순간 속으로 멍청한 셈을 해 본다. ‘마음만 먹으면 하루에 최소한 5마리는 잡을 텐데! 50만 원이면 어느 한 달 나물 팔아 버는 것보다 나은데’ 라고! 망상은 잠시뿐, 얻다 대고 귓전에도 들리지 않을 잡소리를…! 약초꾼은 순리를 거스르지 않는다!
사실 여름에는 숲이 우거지고 뱀이나 벌, 여러 해충들의 방해공작 때문에 다니기 힘들어 그렇지, 산삼은 물론 귀한 약초를 찾는 일이 그리 어려운 게 아니다. 하지만 지하 뿌리와 지상부가 고루 발달하여 보기는 좋으나 약초의 약성이 좋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겨울에는 황량한 골짜기를 오르내리며 상황버섯을 찾아다니거나, 운 좋게 남아 있는 약초의 마른 싹대를 보고 최고 품질의 약초를 캐내기도 한다. 여름과 겨울은 약초꾼에게도 어쩔 수 없이 힘겨운 시절이다.
그래도 여름에는 ‘여름 산삼’이라 불리는 몇 가지 나물들이 있다. 왕고들빼기. 이고들빼기를 비롯한 여러 고들빼기들, 방가지똥, 씀바귀, 영아자 등인데, 이 나물들은 생 쌈으로 밥이나 고기를 싸 먹거나 양념무침으로 만들어 먹으면 한여름에 지친 몸을 세워주고 배탈 걱정을 없애 주는 보약 반찬이다. 겨울에 따는 상황버섯 또한 버섯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겠으나 대부분 그 맛과 약성이 뛰어나 맛을 아는 사람들은 꾸준히 찾아다닌다. 약초꾼은 주로 자작나무상황, 전나무상황, 소나무상황, 개회나무상황을 많이 땄었다. 상황버섯 중에 특별히 찔레나무상황버섯이 있는데 이 버섯은 어린 아이들에게 좋다.
2월이 끝나고 3월이 오면
어느 해이든 2월이 지나 3월이 들어설 무렵이면 몇몇 겨울나물이 나오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약초꾼의 1년 농사가 시작된다. 대표적으로 고산지역 계곡가 근처에 ‘산갓’이라 불리기도 하는 는쟁이냉이가 올라오는데, 단언컨대 는쟁이냉이는 수백 가지 나물 중에 최고라 할 수 있다. 코끝을 톡 쏘는 그 맛은 천연 겨자의 맛이요, 아삭한 식감과 상큼함은 김치와 물김치로 담갔을 때 그리고 다른 나물과 섞었을 때 최고의 맛을 선사해 준다. 낮은 산에 나는 까실쑥부쟁이도 결코 는쟁이냉이에 뒤지지 않는다. 겨울을 뚫고 나온 나물이라 그런지, 평범한 듯 보여도 강인한 생명력의 힘이 뱉어내는 쌉싸름한 나물 맛과 된장국의 맛을 살려내는 비결을 까실쑥부쟁이는 가지고 있다.
3월과 4월은 나무수액의 계절이기도 하다. 예로부터 우리나라는 고로쇠나무 수액과 자작나무 수액을 권장했지만 그 외에도 몇 가지 나무에서 수액 채취가 가능하다. 참다래나무는 가을 열매는 물론, 봄에는 어린순을 나물이나 묵나물로 먹고, 나무껍질과 뿌리는 약재로 쓰여 당뇨와 간 건강에 도움을 준다. 게다가 이른 봄 다래 수액은 그 양도 많이 내어주며 맛도 좋으니 보약 같은 나무라 아니 할 수 없다. 메이플시럽으로 유명한 단풍나무, 신나무, 물박달나무, 오리나무, 가래나무 그리고 수액나무의 제왕이라 할 수 있는 층층나무 수액은 그 색깔부터 붉은 빛을 띠는데 보관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
3월에는 메주로 간장을 담글 계획인데, 일정량의 나무 수액을 초간장물로 사용하려 한다. 나무 수액은 수많은 미네랄과 당분이 들어 있어 매우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잘 감안하여 잘 해낼 수 있을 것이다.
다음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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