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호사, 법학과 01
나도 모르게 공범이 된다
대학교 1학년인 ‘영희’는 겨울방학을 맞아 알바몬에 이력서를 올리고 아르바이트를 구했다. 알바몬에 등재된 ‘항상이겨드림’ 법률사무소 인사부장이 연락을 해왔다.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니, 서울 서초동에 소재하고 부장판사 출신 변호사를 포함한 다수의 변호사가 근무하는 꽤 괜찮은 로펌으로 보였다. 영희는 비대면 면접을 통해 근무시간, 급여, 복장 등 근로조건을 논의하고 근로계약서도 작성했다. 외근직으로 채용된 영희의 업무는 중요한 기밀서류를 의뢰인에게 전달하는 일이었다. ChatGPT에 물어보니, 법률사무소가 중요한 서류를 사무원이 직접 전달하는 것도 업무라는 답이 나왔다. 사나흘 동안 서류를 전달했던 영희는 지금 보이스피싱 현금수거책으로 경찰 조사를 받고 있다. 영희가 전달한 것은 현금이었고, 그 돈은 보이스피싱 상위 조직원의 손에 들어갔다. 영희가 받은 것이라곤 차비, 식대, 그리고 일당 15만 원이 전부다.
그럼에도 영희는 ‘미필적 고의’, ‘순차 공모’라는 형사 법리 안에서 처벌받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피해자는 보이스피싱 조직에게 빼앗긴 돈을 영희에게 청구하겠지만, 경제력 없는 영희에게서 받아낼 것을 기대하기 어렵다. 경찰을 포함한 그 누구도 성명불상의 보이스피싱 주범은 찾지 못한다.
직장인 우상향은 주식이나 코인 투자로 파이어족을 꿈꾼다. 어느 날 약 천 명이 모인 텔레그램 투자리딩방에 초대된 우상향은 며칠 동안 말없이 관망했다. 나름의 탐색전이었다. 운영진으로 보이는 ‘천비트’, ‘고수익’ 등 10여 명은 매일 실시간으로 수백만 원의 수익률을 인증했다. 7일을 지켜본 우상향은 개별 텔레그램으로 투자 방법을 물었다. 자전거래(동일 자산을 동시에 매수·매도하여 가격 차익을 내는 방식) 방식으로 생긴 차액이 수익이기 때문에 별도 자본은 필요 없다는 설명이 돌아왔다. 솔깃해진 우상향은 자신의 계좌를 자전거래에 이용하는 데 동의했다. 빗썸에 계좌를 개설하고, 하루 5억 원까지 이체 가능한 은행 계좌 2개도 만들었다. 우상향의 통장에는 하루에 적게는 3억 원, 많게는 5억 원이 들어왔다. 입금 명의자는 항상 같은 법인이었고, 우상향이 송금하는 곳도 한 곳이었다. 5일 동안 우상향이 받아 송금한 돈은 약 19억 원. 우상향은 현재 전국 14개 경찰서에서 보이스피싱 상부 조직원으로 조사를 받고 있다. 5일 동안 받은 대가는 200만 원이다.
우상향에게 돈을 보낸 법인은 전국 각지에서 들어온 보이스피싱 범죄수익금이 여러 차례 세탁을 거쳐 주범에게 흘러가기 직전 단계였고, 우상향의 계좌는 최종 수익금이 모이는 종착지였다. 우상향은 종착지 계좌의 돈이라도 빠져나가지 못하게 은행에 지급정지를 신청했지만, 피해자가 아닌 공범이 되어버린 우상향의 신청은 거절당했다. 보이스피싱 조직원은 유유히 사라졌다. 우상향은 법원에서 8년 전후의 징역형을 받을 것이고, 경제적 파탄에도 놓이게 된다.
영희와 우상향은 어리석었을까
‘나는 영희나 우상향과 다르다’, ‘그들은 어리석다’는 생각에 머무르기 쉽다. 그러나 주변에는 수많은 영희와 우상향이 있다. 보이스피싱 조직의 수법은 날로 교묘해지고, 학식과 경험이 풍부하더라도 그 정교한 수법 앞에서는 무력하다. 서울대 로스쿨 출신 변호사, 강력계 형사, 현직 부장판사, 대학교수 등이 보이스피싱에 연루되어 처벌된 사례도 있다.
영희에게 주어진 힌트는 ‘비대면’과 ‘서류 전달’, 단 두 가지였다. 우상향에게 주어진 힌트는 ‘자전거래’와 ‘통장 이용’, 역시 두 가지였다. 그러나 수익에 대한 기대와 보이스피싱 조직의 수많은 기교는 영희의 눈을, 사회 경험 많은 우상향의 이성을 마비시켰다. 해마다 보이스피싱 근절 대책이 나와도 피해가 늘어만 가는 이유이기도 하다.
플랫폼의 방관과 SNS 모집의 온상
정부는 2025년 10월, 보이스피싱 근절을 위해 130개 금융사가 참여하는 ‘AI 기반 정보 공유 플랫폼(ASAP)’을 만들고, 삼성전자·KT·SK텔레콤 등 15개 기관이 뭉친 ‘보이스피싱 통합대응단’을 출범시켰다.
그러나 냉정하게 말하면, 범죄 조직이 파고드는 핵심적인 맹점은 여전히 남아 있다. 두 가지 방법으로는 대포통장과 수거책 모집을 원천 차단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보이스피싱 범죄는 대포통장 없이는 성립되지 않는다. 피싱 조직은 다양한 방법과 채널로 통장을 모집한다. 정부의 ASAP가 이미 생성된 대포계좌를 탐지하는 동안, 범죄 조직은 SNS를 통해 새로운 계좌를 실시간으로 조달한다. 당근마켓, 알바몬, 잡코리아 등 구인구직 사이트에 정상적인 직장처럼 위장한 채용 공고를 올려 구직자를 현금수거책으로 이용한다. 수많은 영희가 범죄에 연루되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한 채 범죄 조직의 자금 흐름에 가담하게 된다.
SNS 플랫폼과 구직사이트에 실시간 모니터링 의무를 부과하고, 모집 글 게시자에 대한 추적 시스템을 도입해야 한다. 특히 구직사이트 운영자에 대한 법적 책임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 구직사이트로 조달된 현금수거책들만 처벌받았고, 구직사이트 운영자는 어떤 제재도 받지 않았다. 운영자는 아무런 사회적 책임도 지지 않으면서 여전히 보이스피싱 조직에게 현금수거책을 공급하는 플랫폼 역할을 하고 있다.
골든타임을 놓치는 제도적 한계
현행 「전기통신금융사기 피해 방지 및 피해금 환급에 관한 특별법」상, 피해자가 경찰의 사건사고사실확인원을 제출하지 않으면 초기 약 3일 정도 유지되는 지급정지가 연장되지 않는다. 우상향은 지급정지를 신청할 수 있는 피해자 자격이 없어, 눈앞에서 보이스피싱 조직이 범죄수익금을 모두 가져가는 것을 두고만 봐야 했다.
실무적으로 은행은 자금세탁방지(AML) 의무나 수사 협조를 근거로 지급정지를 유지할 수 있지만, 이는 피해자 구제와는 무관하다. AI가 1분 만에 범죄를 탐지해도, 피해자가 이를 인지하지 못하고 특정 계좌를 지목해 지급정지를 신청하지 않는 한 피해금은 바다를 유영하듯 세탁되어 결국 보이스피싱 조직에 도달한다.
보이스피싱 조직원에게 이용된 우상향 같은 경우를 포함하여, 경찰의 수사 개시 통보나 금융감독원의 의심거래 통보만으로도 지급정지가 가능하도록 하고, 그 기간도 현행보다 연장될 수 있도록 법 개정이 필요하다. 또한 1차 계좌 신고 시 2·3차 계좌까지 자동 추적·동결하는 시스템도 마련되어야 한다.
은행–거래소 간 실시간 공조 체계 구축
범죄 조직은 피해금을 비트코인 등 가상자산으로 세탁한 뒤 해외로 송금한다. 통합대응단 출범 시 체결된 업무협약(MOU)에 디지털자산거래소공동협의체(DAXA)가 포함돼 있기는 하나, DAXA는 민간 기관이고 은행권이 API로 실시간 연동되는 ASAP 시스템에 강제적으로 통합되어 있지 않다.
가상자산 거래소에 법적 의무를 부과해, 은행 계좌에서 거래소로 입금 시 일정 시간 거래를 금지하고, 의심 계좌 정보가 공유되면 거래소 계정도 자동 동결되도록 해야 한다. 또한 은행과 거래소 간 실시간 연동 시스템을 법제화하여 ASAP에서 탐지된 계좌가 거래소에서도 즉시 차단되도록 해야 한다.
범죄 수익이 실현될 수 없는 구조를 만들어야
보이스피싱은 경제적 약자를 피해자로, 취약계층을 도구로 이용해 범죄자로 만든다. 그 정점에 있는 진짜 범죄자는 활보하며 다니는, 최악의 악(惡)이다. ‘보이스피싱을 통해서는 범죄 수익이 실현될 없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그 시작은 대포통장과 현금수거책의 근절이고, 그 중간에는 거래정지와 계좌 동결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끝에는 보이스피싱 주범이 더는 성명불상자가 아닌 ‘특정인’으로 끝까지 추적되어 책임을 지게 만들어야 한다. 이 처음과 끝이 관철되어야 보이스피싱이라는 이름이 언론사 사회면에서 사라질 것이다.
이주하 변호사
법무법인 제이엘피 파트너변호사
사법시험 53회, 사법연수원 43기
충주시 마을변호사(2014.~)
해양환경공단 정보공개심의회, 징계위원회 외부위원(2024. 3.~)
국회추천공직자자격심사특위 위원(2021.~)
한국발명진흥회,
대전창조경제혁신센터,
경기도경제과학진흥원 등 공공기관 면접위원
한국데이터산업진흥원,
남양주시 교통약자지원센터,
광진구 1인가구지원센터 등 외부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