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률자문단 고헌영 단장
동문을 위한 든든한 법률 울타리
– 외대민주동문회 법률자문단 고헌영 단장(법학과 90)
이선민
편집위원장, 신문방송학과 85
외대민주동문회 법률자문단(법자단)은 동문들의 삶을 가까이에서 지켜주는 조용한 안전망이다. 강제징집 피해 선배들의 국가배상 청구부터 일상 속 생활법률 상담까지, 누군가의 삶과 얽힌 문제를 함께 풀어주는 역할을 맡고 있다. 현재 그 중심에서 법자단을 이끌고 있는 고헌영 변호사를 만나 그간의 이야기를 들었다. 이날 인터뷰에는 수줍은 성격의 고헌영 단장을 돕기 위해 함칠성 조직위원장이 함께 자리했다.
박헌영의 이름을 물려받은 변호사
“제 이름이 고헌영이잖아요. 그 헌이 박헌영 할 때 그 헌입니다.”
고헌영 법률자문단장(법학과 90)의 이름에는 아버지의 특별한 바람이 담겨 있다. 가장 존경했던 분의 이름을 아들에게 물려준 것처럼, 그는 어릴 때부터 야당 기질(?)이 가득한 분위기에서 자랐다. 그 이름처럼 그의 대학 생활도 남달랐다. 1990년 법대에 입학해 법풍(법대 풍물패)에서 활동했다.
“문풍(문과대 풍물패) 때문에 그냥 놀러 다니고 따라다닌 거지, 운동에 대해 그렇게 심각하게 고민한 건 아니었어요. 그런데 1991년 6·3이 나면서 선배들이 다 뿔뿔이 흩어진 거예요. 놀 데가 없어서 그때부터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죠.”
그렇게 5년을 공부한 끝에 2002년 마침내 사시에 합격하고 2004년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하며 본격적인 변호사 생활을 시작했다. 변호사 활동을 시작하면서 고 단장은 다양한 사건을 맡았다. 그중에는 현재 국회의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김용민 의원과 공동 피고인의 변호를 맡은 적도 있다.
“김용민 의원이 그때부터 전투적인 성향이 있으셨나 봐요. 형사소송법 이론을 내세우면서 막 하시더라고요. 나중에 TV에 나오는 걸 보고 ‘아, 그때 그분이구나’ 했죠.”
그는 변호사의 호기도 때로는 필요하다고 말했다. 물론 자기가 근거를 가지고 옳게 하는 것이어야지, 막무가내로 하는 건 안 된다고 덧붙였다.
고 단장의 변호사 생활에서 특별한 부분은 은퇴한 관리사무소장들과의 인연이다. 현재 그는 아파트 관리사무소장 모임에 자주 참석하며 무료 법률 상담을 해주고 있다. 동료 변호사들은 그를 “거의 인권변호사”라고 부른다.
“관리사무소가 생각보다 많은 법률문제와 엮여 있어요. 민원도 많고요. 그분들이 은퇴하고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시는 분들이라 도와드리고 싶더라고요.”
그는 스타벅스 쿠폰 한 장만 받으며 상담을 해준다. 고 단장은 무료 상담이기보다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는 그분들로부터 위안을 얻을 때가 더 많아서 오히려 힐링을 얻고 온다며 미소 지었다.
전국 유일의 민주동문회 법률자문단, 그 시작
외민동 법률자문단은 함칠성 조직위원장이 외민동 창립 초기부터 구상해온 프로젝트였다. 경희대 민주동문회에서 한의사 12명이 회원들을 위해 무료 진료와 건강 상담을 하는 모습을 보고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한다. 외대에는 한의대가 없으니 변호사들을 모으자는 것이었다.
전국 민주동문회를 조사한 결과, 자체 법률자문단을 운영하는 곳은 단 한 곳도 없었다. 고대, 서울대, 연대처럼 법대가 강한 학교도 하지 않는 일이었다.
하지만 변호사들을 조직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변호사라는 직종 특성상 서로 다른 로펌, 다른 지역에 흩어져 개인 사업처럼 독립적으로 일하다 보니 집단 활동 자체를 꺼리기 때문이다.
함 위원장은 처음에 일반 회원들의 법률 상담을 목적으로 변호사들을 모았다. 외민동에 몸담은 변호사 동문들은 그 취지에 동감하고 적극 호응했다. 고헌영 단장은 최고 학번 변호사로 단장을 맡게 되었다.
15명 정도 모였을 무렵, 우영제 선배가 제안을 했다.
“강제징집 소송을 민변에서 하지 말고 우리 후배들이 해보면 어떨까?”
그 제안을 계기로 법자단의 본격 활동이 시작되었다. 뜻을 같이한 7명의 변호사가 선배들의 소송을 맡으며 핵심 멤버로 활동하고 있다.
강제징집 피해, 이제야 보상받다
법자단의 첫 번째 큰 프로젝트는 강제징집 피해자들의 국가배상 청구 소송이었다. 1980년대 학생운동을 하다 강제로 군에 입대당한 선배들의 소송이었다. 그중에는 이미 형을 살고 나와 군 면제 대상이었는데도 다시 끌려간 분도 있었다.
“8명이 소송을 했고, 6명은 1심 판결로 끝났어요. 2명이 항소했는데, 두 분은 정말 억울한 케이스예요. 형을 살고 나오면 병역 면제잖아요. 그런데도 강제징집을 당하신 거죠.”
이 소송은 일반 민사 사건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법리 싸움이 아니라 국가의 불법성을 증명하는 역사적 소송이었어요. 시대적 배경이 있는 사람들이고 그 의미가 크니까요.”
정해진 테이블, 그 안에서의 싸움
사실 강제징집 소송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이전에 민변을 통해 소송들이 있었고, 법원은 이미 정신적 손해배상에 대한 기준을 만들어놨다. 민사소송의 금전 계산처럼 계산할 수 있는 손해가 아니기 때문에 법원이 유형별로 금액을 정해놓은 것이다. 고 단장은 이를 ‘테이블’, 즉 가격표라고 표현했다.
“단순히 군대에서 양심에 반하는 일을 강요받은 경우는 3천만 원 정도예요. 그런데 프락치 활동까지 강요받은 경우, 그러니까 제대 후 학교에 다니면서도 계속 프락치 활동을 해야 했던 경우는 최대 9천만 원까지 인정되었죠. 이미 그런 테이블이 형성되어 있었어요.”
문제는 이 정해진 범위 안에서라도 최대한의 보상을 받아내려면, 선배들이 겪은 구체적인 고통을 충분히 드러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단순히 “강제징집 당했다”는 사실만으로는 부족했다. 군대에서 어떤 구체적인 부당한 대우를 받았는지, 어떤 정신적 고통을 겪었는지, 제대 후에도 어떤 압박이 있었는지를 법원이 이해할 수 있도록 해야 했다.
“선배님들은 자신이 겪은 일이 법률적으로 크지 않다고 생각하시는 경우가 많아요. ‘나야 뭐 그냥 군대 다녀왔지’ 하시면서요. 그런데 실제로는 그 안에 엄청난 인권 침해와 정신적 고통이 있거든요. 그걸 구체적으로 끄집어내고 표현하게 해야 법원이 그 심각성을 인정하고 테이블 내에서라도 높은 금액을 판결하는 거죠.”
이것이 바로 변호사와 의뢰인 사이의 정서적 공감대가 중요한 이유였다. 의뢰인이 변호사를 믿고 자신의 아픔을 충분히 털어놓아야, 변호사가 그것을 법정에서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선언문을 타이핑하며 시대를 이해하다
고 단장에게도, 젊은 후배 변호사들에게도 이 소송은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90년대 후반, 2000년대 학번 후배들에게 1980년대 군부독재 시절의 강제징집은 역사책 속 이야기일 뿐이었다. 정서적 공감대를 갖기가 쉽지 않았다.
“제가 법자단 변호사 중에서 나이가 제일 많았어요. 그 밑으로는 90년대 후반 학번 후배들이었죠. 저야 그래도 술자리에 끼어서 선배님들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지만, 후배들은 그런 기회조차 없었으니까 부담이 있었을 거예요.”
그래서 고 단장은 선배들의 이야기를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 노력했다. 담당한 선배가 주신 자료 중에 1980년대에 쓴 선언문이 있었다. 그는 그 선언문을 컴퓨터로 또박또박 타이핑했다. 띄어쓰기 하나, 문장 하나 그대로 옮겨 적으면서 그 시대를 이해하려 했다.
“하도 답답해서 선배님이 쓰신 걸 또박또박 쳐봤어요. 치면서 ‘이 시대에 어떻게 이런 생각까지 하셨지’ 하며 대단하다고 느꼈죠. 그렇게 선언문을 보고 쳐보면서 조금씩 이해하고 가까워질 수 있었어요. 쉽게 공감대가 형성되는 게 아니니까, 그 과정이 필요했던 거죠.”
선배들을 만나 이야기를 듣는 과정도 중요했다. 단순히 법률적 사실관계를 파악하는 게 아니라, 그들이 군대에서 어떤 부당한 대우를 받았는지, 어떤 정신적 고통을 겪었는지 구체적으로 들어야 했다.
“한 선배님은 군대에서 다치셨는데, 그게 구타에 의한 건지 확인할 수가 없었어요. 그런데 선배님 말씀을 듣고 전달하는 거죠. 그분들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그 아픔을 이해하려고 노력했어요. 그래야 선배님도 저를 믿고 더 깊은 이야기를 하실 수 있으니까요.”
이런 과정 자체가 젊은 변호사들에게는 큰 경험이었다.
“국가 권력이 한 개인을 어떻게 처절하게 짓밟았는가를 간접적으로 경험하는 거예요. 이런 사건을 한번 맡아보면 나중에 인권 재판 같은 데 연루되더라도 그 경험이 도움이 되죠. 정말 보람도 느끼면서 배우는 거죠.”
판결 금액은 테이블 범위 내에서 나왔다. 3천만 원에서 9천만 원까지 다양했고, 프락치 활동까지 강요받았던 두 분은 1억과 9천만 원을 받았다.
“제가 담당한 선배님은 테이블보다 높게 나온 것 같아요. 군대에서 다친 것도 있고, 그런 부분들을 다 전달했으니까요.”
“미국 같으면 이거 최소 몇십 억씩 나올 사안인데…”라며 고 단장은 아쉬움을 표했다. 국가가 1심에서 항소를 포기한 것은 “우리는 정해진 대로 줬어, 더 늘어나면 안 돼”라는 의미로 해석된다.
“우영제 선배님은 금액이 크게 늘어나지 않을 거라는 걸 아시면서도 항소하셨어요. 싸우는 과정을 의미로 삼겠다고 하시더라고요.”
변호사 수임료는 민변(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기준을 따라 착수금 없이 성공보수만 받기로 했다. 배상금의 5%를 변호사가 받고, 2.5%는 외민동에 기부하는 방식이다. 최근 소송이 종료된 6명이 자신이 받은 보상금의 2.5%를 외민동에 기부해 재정적인 도움을 주었다. 이 역시 법자단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들은 법률이라는 지식을 동원해 동문을 도울 뿐 아니라 외민동에 재정적 도움이 되고, 기부한 동문들에게는 자부심을 선사하는 역할을 도맡고 있다.
법자단은 강제징집 소송 외에도 5·18 광주민주화운동과 관련된 보상법 행정 신청을 대리하고 있다. 11명의 동문이 5·18 보상법 관련 행정 절차에서 법자단의 도움을 받았다. 1980년대 학생운동에 참여했던 선배들 중 5·18과 연관된 분들의 권리를 찾아드리는 작업이다. 이 역시 착수금 없이 민변 기준에 따라 진행되고 있다.
‘변호사 문턱‘을 낮추는 동문 네트워크의 힘
법자단의 활동은 집단 소송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동문들의 크고 작은 법률문제를 상담하고 해결해주는 것이 오히려 더 중요한 일상 활동이다.
“개별적으로 연락하셔서 상담하시는 것 같더라고요. 다 비밀 유지가 필요한 부분이기 때문에 얘기는 안 하는데, 가끔 변호사들끼리 술 먹다 보면 ‘지금 뭐 이런 거 가지고 하고 있다’ 하는 얘기들을 하더라고요.”
실제로 다양한 상담이 이루어지고 있다. 주차장 확장 과정에서 경계 분쟁이 생긴 경우, 재개발 문제로 어려움을 겪는 경우, 학교폭력으로 피해자가 오히려 가해자로 몰리는 억울한 상황, 이혼이나 상속 문제 등 동문들이 겪는 법률 문제는 생각보다 다양했다. 고 단장은 법률 상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문턱 낮추기’라고 강조했다.
“사람들이 법률 문제에 대해 심리적 문턱이 정말 높아요. 쉽게 넘어갈 수 있는 문턱이라고 생각을 안 하죠. 변호사, 의사처럼 ‘사’자 들어가는 사람 만날 때부터 위축되는 게 있잖아요.”
그런데 동문이라는 연결고리가 그 문턱을 크게 낮춰준다. 고 단장은 문턱이 낮아지면 자신들도 큰 보람을 느낄 기회가 오기 때문에 감사할 일이라고 말했다.
“동문 후배가 친절하고 공손하게 잘해준다고 선배님들이 너무 좋아하시더라는 말을 들었어요. 한 선배님은 상담받고 나서 ‘변호사라는 직업을 다시 보게 됐다. 이렇게 친절한 변호사도 있구나’라고 하셨대요. 그럴 때 정말 보람이 크죠.”
부동산 문제로 고민하던 한 동문은 여의도의 부동산 전문 변호사를 소개받았다. 수임료를 걱정하며 “얼마를 줘야 되나”고 물어왔지만, 무료 상담이었다. 학교폭력 문제로 딸이 피해자에서 가해자로 둔갑당한 경우도 동문 변호사가 합리적인 비용으로 해결해주었다.
“300만 원이면 해결할 수 있는 일인데, 변호사를 어디서 어떻게 찾아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하는 경우가 많아요.”
법자단의 또 다른 장점은 지역별 네트워크다. 현재 서초동, 여의도, 일산, 남양주, 광주, 부산 등에 외대 출신 변호사들이 활동하고 있다. 고 단장은 앞으로 이런 지역 네트워크를 더 강화하고 싶다고 했다.
“광명시, 일산 같은 곳에도 외대 출신 변호사들이 있어요. 나중에는 지역 동문들이 굳이 서울까지 올라오지 않아도, 자기 지역에서 가까운 변호사를 만나 소주 한잔 하면서 편하게 상담 받을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고 싶어요.”
변호사 입장에서도 초기 상담의 중요성은 크다. 초반에 상담을 통해 방향을 잡아주면 나중에 손댈 수 없을 만큼 문제가 커지는 걸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건이 막 곪아 터져서 왔을 때는 손댈 수가 없는 경우가 있거든요. 초반에 조금이라도 전문가의 조언을 받았다면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경우도 많아서 안타까울 때가 많아요.”
그는 법자단이 동문들에게 주는 가장 큰 가치는 ‘안심’이라고 말했다.
“별거 아닌 것 같아도 거기에 고민하는 시간이 줄어드는 거예요. ‘이게 법적으로 문제가 되는 건가?’ ‘변호사를 써야 하나?’ ‘비용은 얼마나 들까?’ 이런 고민들이 한 통의 전화로 해결되는 거죠. 법자단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든든하다고 하시더라고요.”
“생활 속 법률자문단“을 꿈꾸다
법자단의 미래 계획은 명확하다. 더 많은 후배 변호사를 영입하고, 동문들이 더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다.
“원래 목표는 15명 정도였어요. 지금 핵심 멤버가 7명인데, 시간이 부족해서 아직 그 정도까지는 못 갔죠. 앞으로 더 많은 후배들을 만나서 법자단을 키워갈 생각입니다.”
고 단장은 특히 젊은 변호사들을 포진시키려 하고 있다.
“방명기 변호사는 2004학번이고, 이주하 변호사는 2001학번이에요. 이런 후배들을 미래를 위해 미리 훈련시키는 거죠. 외민동의 미래 동문들을 위해서요.”
가장 기대되는 변화는 곧 오픈하는 외민동 홈페이지다.
“외민동 집행부에서 홈페이지에 법자단 게시판을 만들 거라고 하시더라고요. 상담이 필요한 동문들도 쉽게 상담을 청할 수 있고 바쁜 변호사들에게도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해요. 게시판에 닉네임으로 질문하면 법자단 변호사가 답변해주는 시스템이죠.”
이 시스템의 장점은 동문들의 심리적 부담을 줄여준다는 것이다.
“일일이 찾아가서 만나는 게 부담스러운 분들도 있어요. 간단한 상담은 온라인으로 해결하고, 심각한 건 직접 만나면 되는 거죠. 별거 아닌 것 같은데 ‘이걸 변호사한테 물어봐도 되나’ 하는 분들도 게시판에는 편하게 질문하실 수 있잖아요.”
고 단장은 변호사들의 부담도 고려하고 있다.
“강제징집 소송처럼 큰 사건은 의무감도 있고 시간도 많이 들어요. 그런데 일상적으로 편하게 부담 없이 상담하는 부분이 자주 있으면, 후배들도 ‘나도 뭔가 하고 있다’는 보람을 느끼면서 외민동과 더 가까워질 것 같아요.”
이름처럼 살아가는 변호사
고 단장은 법자단에 대해 겸손하게 말했다.
“저는 바지 단장이에요. 뒤에서는 카톡에서 후배들이 다 해놓고 ‘오빠가 해’라고 멍석 깔아주는 거예요. 내부적으로는 후배들이 활달하게, 적극적으로 움직여요.”
그는 외민동 후배 변호사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변호사들끼리는 안 만나요. 1년에 한 번 만날까 말까 한데, 이렇게 모여서 활동해준다는 게 대단한 거거든요. 우리 외민동 후배 변호사들이 너무 고마운 거죠.”
동문들에게는 이렇게 당부했다.
“법자단을 편하게 생각하고 문턱을 낮게 봐주세요. ‘저 사람도 나의 동문이다’라는 생각으로 언제든 법률 조언을 구하시면 됩니다. 다른 학교도 변호사들이 많은데 아직 잘 모이지 않는 것 같아요. 어떤 후배가 그러더라고요. ‘다른 학교는 함칠성 선배가 없잖아.’ 정말 맞는 말씀이에요.”
박헌영의 이름을 물려받은 변호사. 그는 이제 외민동 법률자문단을 통해 그 이름의 의미를 실천하고 있다. 법의 문턱을 낮추고, 동문들 곁에서 함께하는 것. 그것이 전국 유일 법률자문단이 걸어가는 길이다.
사진: 외민동 법률자문단 활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