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대항쟁의 기억

건대항쟁의 기억

건대항쟁의 기억

-그 뜨거웠던 1986년 10월을 되돌아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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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민신

서어과 85학번

□ 죽음으로 증명된 시대의 절규

1986년, 그해는 우리 청춘들의 피가 강물처럼 흘렀던 해였다. 춘삼월, 구로공단 신흥정밀의 스물일곱 청년 박영진이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살인적인 부당노동행위 철회하라!”고 외치며 옥상에서 불길 속으로 몸을 던졌다. 그는 온몸이 불타는 와중에도 “전태일 선배가 못 다한 일을 내가 하겠다. 천만 노동자의 권리를 찾겠다”는 마지막 유언을 남겼다.

사월에는 서울대 자연과학대 학생회장 김세진과 이재호 동지가 전방입소교육 반대를 외치며 신림사거리에서 함께 분신했다. 오월에는 서울대 원예학과 이동수가 5월제 행사 중 “파쇼의 선봉 전두환을 처단하자! 미제국주의 물러가라!”고 외치며 분신 투신했다. 온몸에 불길을 두르고 떨어진 그의 모습을 본 학우들은 절규했고, 아크로폴리스는 순식간에 비탄과 분노의 바다가 되었다.

그 소식들이 전해질 때마다 우리는 미네르바 동산에서 막걸리 잔을 기울이며 무력감에 몸서리쳤다. 동지들의 죽음 앞에서 느끼는 죄책감과 분노, 그리고 무엇인가 해야 한다는 절박함이 가슴을 짓눌렀다. 더 이상 멀리서 소식만 듣고 있을 수는 없었다.

□ 연대의 불꽃, 전국으로 번지다

이때부터 대학가에는 새로운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각 학교별로 산발적으로 이루어지던 투쟁을 하나로 묶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그해 여름과 가을을 거치며 전국적인 규모의 대학 투쟁조직 결성에 대한 요구가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이제는 각개전투가 아니라 연합전선을 구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전국에서 울려 퍼졌다. 그런 열망들이 모여 ‘전국반외세반독재애국학생투쟁연합’, 줄여서 ‘애학투련’ 결성으로 이어졌다.

1986년 10월, 나는 외국어대학교를 대표하는 학생 중 한 명으로 건국대학교 캠퍼스에 발을 들여놓았다.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대학생들로 가득한 그곳에서 나는 전율을 느꼈다. 경상도 사투리, 전라도 사투리, 충청도 사투리가 뒤섞인 그 공간은 바로 민족의 미래를 짊어진 젊은이들의 대동단결이었다.

당시 우리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5.18광주항쟁에 대한 진상규명, 민주화, 통일에 대한 염원은 단순한 구호가 아니라 목숨을 걸고 지켜내야 할 신념이었다. 그해 희생된 박영진, 김세진, 이재호, 이동수를 비롯한 수많은 열사들의 뜻을 이어받아야 한다는 사명감이 우리를 이끌었다.

애학투련 결성식에 참여한다는 것은 단순히 한 대학의 투쟁 차원을 넘어서는 일이었다. 이는 전국 차원의 학생운동 조직화를 통해 독재정권에 체계적으로 맞선다는 역사적 선언이었다.

3박 4일간의 농성이 시작되었을 때, 건물 안은 열기로 가득했다. 각자 다른 지역, 다른 대학에서 온 학생들이지만 하나의 목표를 향해 단결되어 있었다. 밤낮으로 이어지는 토론에서는 조국의 미래에 대한 진지한 고민들이 오갔다.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진압에 대한 긴장감 속에서도 우리는 희망을 잃지 않았다.

□ 마지막 날, 그 처절했던 순간들

그러나 마지막 날이 되자 상황은 급변했다. 아침부터 시작된 경찰의 진압작전은 우리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치밀하고 무자비했다. 최루탄이 건물 안으로 날아들기 시작했고, 곧이어 어디선가 연기가 피어올랐다.

처음에는 최루탄 연기려니 했지만, 곧 그것이 화염임을 깨달았을 때의 공포감은 지금도 생생하다. 화염이 아래층부터 치솟아 오르고, 우리는 살기 위해 옥상으로 향했다. 수많은 학우들이 같은 생각으로 계단을 오르니 옥상 정문은 이미 사람들로 가득 찼다.

다른 길을 찾아야 했다. 창문으로 향했지만, 그 몇십 센티미터의 창턱이 삶과 죽음을 가르는 경계가 되었다. 온 힘을 다해 몸을 밀어 올리려 했지만, 뒤에서 밀려오는 학우들과 몸이 맞닿은 채 움직일 수도 없었다. 반쯤 걸린 몸은 어정쩡한 채로 매달려 있고, 아래로 미끄러질 수도 위로 올라갈 수도 없는 상황.

숨이 가빠지고, 힘이 빠져가는데 시간은 멈춰서지 않았다. 그 절망적인 짧은 순간, 살고 싶다는 간절함과 죽음에 대한 공포가 뒤섞여 가슴을 짓눌렀다. 동시에 머릿속에는 “이렇게 죽으면 안 되는데… 아직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은데…” 하는 생각과 함께 “이것이 조국을 위한 죽음이라면…” 하는 비장한 각오도 스며들었다.

그때의 헉헉거리던 숨소리, 창턱에 박힌 손가락의 아픔, 뒤에서 들려오는 비명소리들… 이 모든 것들이 지금도 꿈속에서 생생하게 되살아나 나를 괴롭힌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우리가 추구했던 민주주의와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그리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치러야 할 대가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 불꽃 같았던 청춘, 그 숭고한 의미

다행히 나는 그날을 무사히(?) 넘겼다. 건대항쟁은 단순한 학생시위가 아니었다. 그것은 우리 세대가 독재정권에 맞서 외친 자유에 대한 갈망이었고, 더 나은 사회를 향한 간절한 꿈의 실현이었다.

비록 그날의 가혹한 진압으로 많은 동료들이 연행되고 다치긴 했지만, 우리의 외침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 애학투련의 결성은 이후 전국 대학생들의 조직적 투쟁의 기반이 되었고, 그것은 결국 이듬해 6월 항쟁의 거대한 물결로 이어졌다.

그 사건을 통해 나는 연대의 참된 힘을 배웠다. 서로 다른 대학에서 온 학생들이지만 공동의 목표 앞에서는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개인의 안위보다 소중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몸소 체험했다. 또한 역사의 거대한 소용돌이 속에서 개인이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동시에 그 작은 개인들이 모였을 때 얼마나 큰 변화의 힘이 될 수 있는지도 깨달았다.

무엇보다 그 경험은 나에게 삶과 죽음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주었다. 죽음의 공포를 직면한 후에야 삶의 소중함을 진정으로 알게 되었고, 평범한 일상이 얼마나 감사한 것인지 깨달았다. 그 이후로 나는 매일매일을 더욱 의미 있게 살아가려 노력하게 되었다.

□ 오늘을 사는 청년들에게

세월이 흘러 이제는 중년이 된 지금, 그 시절을 돌아보면 부끄러운 마음과 자랑스러운 마음이 교차한다. 때로는 너무 무모했다는 생각도 들지만, 그런 무모함이 있었기에 오늘의 민주주의가 가능했다고 믿는다.

현재를 살아가는 젊은 세대들에게 건대항쟁의 경험이 어떤 의미일지 생각해본다. 직접적인 독재정권은 없지만, 여전히 우리 사회에는 타파해야 할 많은 문제들이 있다. 경제적 불평등, 사회적 갈등, 환경 문제 등 새로운 형태의 과제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중요한 것은 그 시대 우리가 보여준 열정과 용기의 정신이다. 불의에 맞서는 용기, 동료를 위한 연대의식, 더 나은 사회를 향한 꿈. 이런 가치들은 시대가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 청춘의 특권이자 책임이라고 생각한다.

건대항쟁 당시 우리가 외쳤던 “민주화”는 단순히 정권을 바꾸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모든 사람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사회, 정의가 살아 숨 쉬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다짐이었다. 그 꿈은 아직도 진행형이다.

오늘날의 젊은이들도 각자의 방식으로 시대의 과제와 맞서고 있을 것이다. 촛불을 들고 광장에 나서는 모습에서, 기후변화에 맞서 목소리를 높이는 모습에서, 차별과 혐오에 반대하며 연대하는 모습에서 나는 그 시절의 우리를 본다. 그들에게 건대항쟁의 기억이 작은 영감이라도 될 수 있다면, 그 뜨거웠던 나날들이 헛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 마무리하며

건대항쟁에서 겪었던 그 절박했던 순간들은 이제 내 인생의 소중한 자산이 되었다. 죽음의 공포 앞에서도 굴복하지 않았던 그 시절의 나 자신이 자랑스럽고, 함께 했던 동지들이 고맙다.

그때 창턱에 매달려 있던 내가 지금 이렇게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다. 그 기적 같은 일상 속에서도 건대항쟁의 정신을 잊지 않으려 한다. 더 정의로운 사회, 더 인간적인 세상을 향한 꿈 말이다.

바라는 것은 나 또한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그 시대의 정신을 계승해 나가길 바란다. 우리의 젊은 날이 아름다웠던 것은 무모한 용기 때문이 아니라, 더 나은 세상을 향한 순수한 열망 때문이었다는 것을 기억하며.

건대항쟁의 불꽃은 꺼지지 않았다. 그것은 지금도 우리 모두의 가슴 속에서, 이 땅을 사랑하는 모든 이들의 마음속에서 활활 타오르고 있다. 그 불꽃이 있는 한, 우리의 꿈은 반드시 실현될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2025년 5월,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가 ‘1986년 10·28 건국대 시위 관련 불법구금 인권침해 사건’에 대해 진실규명 결정을 내렸다. 위원회는 당시 1,500여 명의 학생이 체포되고 1,200여 명이 구속수사를 받는 과정에서 형사소송법상 구속영장 발부 시한을 넘겨 불법 감금된 사실을 확인했다. 38년이 지난 지금에야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우리의 피해는 뒤늦은 위로이자 역사적 진실 규명의 소중한 성과라 할 수 있다. 이제라도 그날의 고통과 희생이 헛되지 않았음을 공식적으로 인정받게 되어 마음 한편이 무겁지만 다행스럽다. 하지만 아직 시작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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