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인터뷰
음악으로 시대를 노래하고, 연기로 세상을 살아내다
– 외민동가 만든 김종호(84학번) 동문
이선민
편집부장, 신방과 85학번
‘청계천 8가’에 얽힌 추억이 있는 이들, ‘열사가 전사에게’, ‘누가 나에게 이 길을 가라 하지 않았네’ 같은 노래를 함께 불렀던 이들에게 김종호라는 이름은 낯설지 않을 겁니다. 천지인의 리더이자 최근 ‘외민동가’를 만들어 다시금 화제가 된 그는, 여전히 새로운 도전과 후회를 동시에 이야기하는 솔직한, 천상 예술가였습니다. (편집자 주: 그를 김성민으로 기억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김성민은 노동자노래단 시절 그의 예명이기도 하였습니다.)
😊 “괜히 그거 해가지고…” 솔직함이 매력인 사람
김종호 동문을 만나자마자 느껴지는 건 그의 솔직함이었다. 성공담보다는 실패담을, 자랑보다는 후회를 먼저 꺼내는 그의 화법은 흔히 말하는 ‘예술가의 자기 미화’와는 거리가 멀다.
후회의 시작은 고교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용문고 연극반에서 김상중과 함께 활동하며 연극영화과 진학을 꿈꿨지만, 3학년 담임이 “일반 대학에 진학하는 게 우선”이라며 길을 막았다. “1, 2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 계속 계셨다면 연극영화과에 갔을 거예요.” 그는 지금도 그 순간을 아쉬워한다. 그러나 그 좌절은 역설적으로 외대 수학과에 입학해 외민동을 만나게 한 계기가 되었다.
사회에서도 갈림길은 반복됐다. MBC 파업 공연 무대에서 손석희 아나운서가 “말도 재미있게 잘하고 재치가 넘치는데 코미디언 해보라” 권했지만 그는 “꽃다지를 지키겠다”며 거절했다. 뒤돌아보면 인생의 분기점마다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었지만, 그는 늘 자신이 믿는 길을 선택했다.
외민동가 제작 과정에서도 특유의 자조 섞인 농담이 따라붙었다. 결혼식 뒤풀이 자리에서 “외민동가를 만들어달라”는 요청을 흔쾌히 수락했지만, 정작 제대로 된 음원 제작은 복잡한 과정이었다. <땅에 내린 별, 내란을 넘다> 출판기념회에서 백자 공연이 취소되면서 급하게 그에게 공연 의뢰가 들어왔다. 청계천 8가를 불러달라는 요청이었지만 그는 이왕이면 이번 기회에 외민동가를 제대로 음원제작하고 싶다는 욕심을 냈다.
“괜히 그거 해가지고…. 그냥 청계천 8가만 불렀으면 됐을 텐데.”
시간이 촉박해서 밤새워 편곡하고 가수들을 급하게 섭외해야 했던 5일간의 고생을 회상하며 투덜거리지만, 결국 외민동문회에 대한 애정으로 끝까지 해낸 것이 그다운 모습이다.
📚 독학의 달인이 걸어온 도전의 길
김종호 동문의 가장 큰 특징은 무엇이든 독학으로 해내는 놀라운 능력이다. 1980년대 당시만 해도 음악을 배울 수 있는 곳은 극히 제한적이었다. 예술 전문대학도 거의 없던 시절, 그는 스스로의 힘으로 작곡법을 터득했다.
“연기도 독학, 작곡도 독학, 노래도 독학. 내가 뭐 외국에 가서 공부한다고 유학이라도 다녀왔겠어요?”
노동자 노래단 활동에서 그의 독학 정신이 본격적으로 빛을 발했다. 단순히 노동자를 위한 노래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직접 현장으로 들어가 구로공단의 중소기업 여공들과 만나며 노래패를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체계적인 작곡법을 스스로 터득했다. 무노동 무임금 같은 이슈가 나오면 모여서 가사를 함께 만들고 집단 작곡하는 방식이었다.
“‘어깨죽지에 빛나는 상처’라는 가사를 놓고 다 같이 멜로디를 만들어가는 방식이었어요.”
4분의 4박자, 16마디 구조로 동기를 만들고 반복하며 노래를 완성해나가는 체계적인 방법론을 스스로 개발했다. 이런 공동창작을 통해 ‘누가 나에게 이 길을 가라 하지 않았네’라는 대표곡이 탄생했다.
꽃다지를 나온 후, 그는 다시 외대로 돌아가 새물결 활동을 하며 새로운 팀을 꾸렸다. 키보드, 드럼, 베이스 연주자들과 함께 처음에는 ‘좋은 친구들’이라는 이름으로 시작했다가 나중에 천지인으로 바뀌었다. 천지인은 그의 음악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천지인으로 바뀐 건 내 뜻은 아니었어요. 좋은 친구들이라는 팀이 이미 있더라고요. 어쨌든 천지인을 통해 꽃다지에서 받아주지 않았던 내 곡들을 발표할 수 있어서 좋았어요.”
1993년 발표한 천지인 1집은 그동안 쌓아온 음악적 역량의 결실이었다. ‘청계천 8가’, ‘우리들의 외식’ 같은 곡들이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으며 천지인은 일약 주목받는 그룹이 되었다. 하지만 그 뒤에는 험난한 제작 과정이 있었다.
천지인 1집을 만들 때 500만원의 제작비를 구하지 못해 카드 할부와 현금서비스로 음반을 제작해야 했지만, 결국 완성해냈다. 심지어 테이프 제작 과정에서 기술적 문제가 발생해 재제작까지 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았다. 자신의 음악을 세상에 알리고 싶다는 간절함이 있었기 때문이다.
1997-98년에는 무대 연출 분야에도 도전했다. 홍대 인디밴드들의 클럽 합법화 운동 ‘자유’ 시리즈를 연출하며 대규모 공연을 기획했다. 미국의 우드스탁 같은 3박 4일 페스티벌을 만들어보자는 야심찬 계획이었다. 고대 노천극장에서 시작해 잠실 체조경기장까지 진출하며 전국 순회 공연을 성공시켰다. 이후 임동창, 산울림 30주년 공연 등 다양한 콘서트 연출을 맡았고, 민주화운동 기념사업회 공연을 세종문화회관에서 연출하기도 했다.
45세에 배우로 전향하겠다고 마음먹었을 때도 그의 도전정신은 또 한 번 힘을 발휘했다. 먼저 배우로 성공한 후배로부터 단편영화부터 찍어서 프로필을 만들라는 조언을 듣고 당장 실천에 들어갔다. 한 달 정도 후 후배가 어떻게 할 만하냐고 물었을 때 그는 이미 30편 가까운 독립영화에 출연한 뒤였다. 또한 프로필 제작과 DVD 편집까지 독학으로 익혀 제작사에 배포할 수 있는 작품을 만들어냈다.
💔 인연과 상처, 그리고 늦게 알게 된 진실
인생의 중요한 전환점마다 타인의 영향이 컸던 그는, 그런 인연들에 대해 원망 반 고마움 반의 복잡하면서도 따뜻한 감정을 드러낸다. 특히 영어연극에서 만난 선배에 대한 이야기는 그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외대 학생회관에서 “연극 뮤지컬 캐스팅 배우 모집” 공고를 보고 오디션에 합격한 후, 1학년 중간고사 전까지가 대학생활 4년 중 가장 화려했던 시절이었다고 회상한다. 특히 여주인공으로 캐스팅된 선배의 노래 실력은 충격적이었다. 조용필이 ‘기도’를 부르면 관객들이 비명을 지르듯 환호하는 것처럼, 그 선배가 노래하면 똑같은 반응이 나왔다.
“그 선배가 공연이 끝나고 나니까 새물결에 들어오라고 하더라고. 김민기, 한대수 같은 사람들의 노래를 부른다는데 뭔가 했지. 그게 외대 새물결 활동의 시작이었어.”
그때까지 조용필이나 퀸, 비틀즈만 알고 있던 그에게 새물결이라는 동아리는 완전히 새로운 세계였다. 하지만 그 선배는 1년도 안 되어 “나 브로드웨이 갈게” 하고 대학을 그만두고 뉴욕으로 떠나버렸다.
“날 이렇게 만들어놓고 말이에요. 정말 나쁜 사람”
하지만 그 만남이 없었다면 지금의 자신도 없었을 것임을 잘 알고 있다.
천지인에서의 인연들도 마찬가지로 복잡한 감정을 남겼다. 밴드 활동 중 가장 아팠던 것은 멤버들이 연이어 떠나면서 악기까지 가져가는 일들이었다. 베이스 연주자는 낙원상가 전당포에서 200만원에 산 미국산 빈티지 베이스를, 키보드 연주자는 키보드를 들고 나가버렸다. 그럴 때마다 가슴이 아팠다. 가수만 14명이나 바뀌었고, 매번 새로운 멤버가 들어올 때마다 처음부터 다시 연습해야 했다.
천지인에서 나오게 된 과정도 비슷한 맥락이다. 당시에는 음악적 견해 차이로 자연스럽게 나온 것이라 생각했다. 김종호는 기존 천지인 1집 같은 분위기를 계속하고 싶었지만, 다른 멤버들은 록으로 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20년이 지나서 팟캐스트 인터뷰 중 충격적인 진실을 알게 되었다. 자신이 음악적 견해 차이로 자연스럽게 나온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내부에서 그를 쫓아낸 것이었다는 사실을. 나중에 함께 천지인 활동을 했던 후배가 연락을 해오며 화해가 이루어질 수 있었다.
“아무리 곡을 3집까지 만들고 아무리 활동을 해도 천지인 하면 다들 청계천 8가만 얘기했어요. 형이 만든 곡이 천지인의 대표곡인데 형님 없이 활동하는 게 너무 속상했어요.”
다시 만나서 함께 공연도 하며 서로 화해할 수 있었다. 이런 식으로 인연의 진실을 뒤늦게 알게 되는 일들이 그의 인생에는 유독 많다.
🎨 예술가이자 노동자, 냉정한 현실 인식
45세가 되던 해, 김종호는 새로운 꿈을 품었다. 연극계 후배들인 박철민, 정인기 등이 성공하는 모습을 보며 자신도 배우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과 함께 연극 활동을 했던 시절의 경험이 있었기에 불가능한 도전은 아니라고 판단했다.
아이리스를 시작으로 200여 편의 드라마와 영화에 출연하며 베테랑 조연배우로 자리잡았다. 384기동대에서는 고정 출연하며 마동석과도 함께 연기했다. 그의 강점은 동안에 다양한 연기 스펙트럼을 가진 것이다. 50대가 넘어서도 30대 말부터 50대 초까지 다양한 역할을 소화할 수 있고, 특히 개성 있는 캐릭터들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그의 차가운 인상과 까칠한 성격이 오히려 나쁜 역할, 비리 캐릭터, 꼰대 등 눈에 띄는 조연 역할 캐스팅에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배우로서의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 초기에는 사기에 가까운 착취를 당하기도 했다. 30만원을 받아도 30% 수수료를 떼고 교통비와 숙박비를 빼면 2,500원밖에 남지 않았고, 실연자협회나 방송등급제 같은 기본적인 시스템조차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다. 방송국에서 정식 배우로 인정받고 처음으로 출연료 60만원을 받게 되었을 때는 눈물이 날 정도로 감격했다고 한다.
그런 시행착오를 겪으며 시스템을 익히고 등급도 올려 회당 출연료를 150만원까지 받게 되었지만, 이제는 또 다른 고민이 생겼다. 출연료가 오르자 역설적으로 캐스팅 기회는 줄어든 것이다. 제작진 입장에서는 같은 역할을 더 저렴한 비용에 할 수 있는 배우를 선호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는 배우를 노동자로서 당당히 인식하고 있다. 방송연기자노조 조합원으로 가입해 출연료 정산이나 재방송료 혜택을 누리고 있으며, 실연자협회를 통해 권익을 보장받고 있다.
“배우도 노동자예요.”
예술가이면서 동시에 노동자라는 이중적 정체성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그의 모습에서, 오랜 민중 음악 활동을 해온 사람다운 면모를 엿볼 수 있다.
✨ “제대로 할 게 아니면 하지 말자” 라는 완벽주의자의 따뜻한 현실주의
김종호 동문이 외민동문회의 미래에 대해 구체적인 고민을 하게 된 배경에는 최근의 경험들이 있다. 외민동가를 만들면서 겪은 일이 대표적이다. 막상 하자고 해서 노래는 만들었는데 정작 제대로 된 음원을 만드는 단계가 되자 상황은 달라졌다. 편곡도 해야 하고 녹음실도 빌려야 하고 가수들도 연습을 시켜야 하는데, 이런 구체적인 과정에 대해서는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더라는 것이다.
“‘좋다, 괜찮다’라고만 하고 다음 과정은 없더라고요.”
이런 경험을 통해 그는 깨달았다. 사람들은 좋은 아이디어에는 쉽게 찬성하지만, 실제 실행 과정의 어려움은 잘 모른다는 것을. 그래서 외민동문회 문화예술위원회에 대한 그의 접근법은 철저히 현실적이다.
“제대로 할 게 아니라면 하지 말자.”
단순한 중창단이 아니라 이소선 합창단 같은 수준의 팀을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제대로 된 레퍼토리를 갖추고 정기적으로 공연을 다니며 수익도 창출할 수 있는 그런 조직 말이다.
장기적으로는 복합문화공간을 만드는 계획도 제시했다. 그가 꿈꾸는 복합문화공간에 대한 구상은 매우 구체적이다. 단순한 모임 공간이 아니라 연습실, 소극장, 갤러리, 카페 기능을 모두 갖춘 곳을 만들어 일자리도 창출하고 생활비도 마련할 수 있는 그런 공간이다. 700명의 동문 중에는 분명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있을 것이기 때문에 실현 가능할 것이라는 믿음도 있다.
🤝 60대의 고민, 함께 꿈꾸는 미래
김종호 동문이 이런 문화 공간에 대해 고민하게 된 또 다른 이유는 현재 자신이 운영하고 있는 홍대 파티룸에서의 경험 때문이다. 원래는 작업실로 꾸미려고 했는데 파티룸으로 운영하게 되었다. 젊은 층에게는 인기가 있지만 같은 세대들의 반응은 시원치 않다.
“우리 연배 사람들은 귀찮아해요. 추우면 춥다, 더우면 덥다, 비 오면 비 온다고.”
이런 현실을 보면서 그는 깨달았다. 젊은 세대를 위한 공간과 콘텐츠는 넘쳐나지만, 정작 자신과 같은 60대를 위한 것은 턱없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서른즈음에’라는 30세를 위한 노래는 있는데 60세를 위한 노래는 없잖아요.”
현재 가장 많은 인구를 차지하는 60대를 위한 문화 콘텐츠나 소통의 장이 부족하다는 지적이다. 더욱이 외민동문회 700명 중 상당수가 은퇴를 앞두고 있거나 이미 은퇴한 상황이다.
“선후배들을 만나면 생활고도 막 얘기하더라고. 어떤 동문들은 은퇴하고 받은 돈으로 다른 사업하다가 말아먹고 고생한다는 말도 하고.”
이런 현실을 목격하면서 그는 은퇴 후의 삶에 대한 고민을 개인적 차원을 넘어 세대적 과제로 인식하게 되었다. 협동조합 형태의 상부상조 시스템이나 실질적인 복지 방안에 대한 논의도 필요하다고 본다.
“워킹맘 카페처럼 우리도 뭔가 만들 수 있잖아요.”
현재의 파티룸 운영도 임시방편일 뿐이다. 겨울 성수기를 넘기고 나면 다른 방향을 모색할 계획이다. 그가 꿈꾸는 것은 단순한 사업이 아니라 같은 세대가 함께 어울리고 서로 도우며 문화적 소양도 기를 수 있는 그런 공간이다.
김종호 동문과의 대화는 마치 오랜 친구와 나누는 진솔한 인생 이야기를 듣는 것 같았다. 성공과 실패를 오가며 살아온 그의 인생 역정에는 허세나 미화가 없다. 대신 현실을 직시하는 냉정함과 그럼에도 계속 도전하는 뜨거운 마음이 공존한다.
60대가 된 지금도 여전히 새로운 프로젝트를 구상하고 있는 그의 모습에서 진정한 예술가의 면모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음악을 하든 연기를 하든 결국 사람들과의 소통이라는 그의 철학은, 지금 이 순간에도 동문들과 함께 만들어가고 싶은 미래를 통해 실현되고 있다. 완벽하지 않더라도, 후회가 남더라도, 그는 계속해서 사람들과 함께 무언가를 만들어가고 있다. 그리고 그 마음이 외민동가라는 새로운 노래에 담겨 우리에게 전해진다.
사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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