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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는 다시는 광화문에서 만나지 말자

- 12.3 내란의 밤부터 윤석열 파면까지, 완전한 승리를 위한 6개월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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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양희

영어과 86학번

2025년 3월 초부터 사람들의 눈과 귀는 모두 헌법재판소를 향해 있었다. 그렇게 하루가 흐르고, 일주일이 가고, ‘뭐가 잘못되어 가는 것 같다’는 불안함이 하루하루를 광장에 모이게 했다. 3월 29일 범시민대행진 광화문 집회였다. 정태춘 님이 무대에 올라 ≪92년 장마, 종로에서≫를 불렀다. 2016년 박근혜 퇴진을 촉구하는 촛불집회에서 들었던 그 노래를 다시 광화문 광장에 모여 듣고 있다. 가사를 읊조리다 보니 지금의 이 상황이 서글퍼서인지 갑작스레 눈물이 흘렀다.

그렇게 서울은 장마권에 들고

다시는

다시는 종로에서 깃발 군중을 기다리지 마라

기자들을 기다리지 마라

비에 젖은 이 거리 위로 사람들이 그저 흘러간다

흐르는 것이 어디 사람뿐이냐

우리들의 한 시대도 거기 묻혀 흘러간다

💢 계엄령 선포, 모욕감과 분노를 불러일으키다

 2024년 12월 3일 10시가 훨씬 넘은 시간! 딸아이가 거실로 후다닥 뛰어나왔다.

“윤석열이 계엄을 선포했어. 지금 국회로 가야 해.” 뜬금없는 말에 TV를 켜니 속보 자막이 뜬다. “잘못된 보도일 수 있으니 조금만 기다려 보자! 이 시간엔 여의도로 가는 지하철도 끊긴다고.”라고 아이를 막아섰다. 지하철은 핑곗거리일 뿐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았다. 군부독재 시절도 아니고, 21세기에 전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초고속 인터넷망이 있는 대한민국에서 계엄이라니! 머릿속이 하얘지면서 대학 때 처음으로 마주한 5.18 광주의 모습이 확 지나갔다. 인간 같지도 않은 놈의 입에서 ‘계엄령 선포’라는 말을 들어야 하는 모욕감과 분노가 치밀었지만, 촛불집회 몇 번 나가본 것이 전부인 딸아이를 보낼 수는 없었다. 두려웠다.

외민동 톡방도 실시간 대화로 난리이다. 영어과 선배인 경우 형, 칠성 형 그리고 이름은 낯선 동문들이 국회를 향해 그 밤에 달려가고 있었다.

뉴스에서는 헬기가 국회의사당 상공을 날고, 장갑차가 도로를 가로지르고 있다. 무장 군인들이 유리창을 깨고 국회의사당 안으로 들어가려 하고, 국회의원 보좌관들이 소화기를 뿌리면서 저지하려고 애쓴다. 국회 밖에서는 수많은 시민이 ‘독재 타도! 계엄 철폐!’ 구호를 외치면서 군인들을 온몸으로 막아서고 있다. 한 여성이 장갑차를 막는 모습, 진입을 막기 위해 도로에 앉아 있는 사람들도 보인다. 일흔은 넘어 보이는 여성의 모습도 보인다. “나는 살 만큼 살았으니, 나이 든 사람이 앞에 나서야지. 젊은이들을 다치게 할 수는 없잖아.” 그분의 말 한마디와 국회의사당의 많은 사람들이 나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5.18 광주는 어떤 이에게는 공포를 느끼게 하지만, 또 어떤 이에게는 목숨을 걸고서라도 지켜야 할 가치가 무엇인지를 알려준 것이다.

무엇이 그들보다 더 강한 힘이었는가. 우리는 그들보다 못한 조직력, 실천력을 가지고 더구나 무기와 자원은 있지도 않다. 그렇다면 그들보다 더 나은 다른 힘이 있어야 한다.

💔 12월 3일 이후, 일상이 깨지다

다행히 시민들과 야당 국회의원들의 목숨을 건 투쟁으로 계엄은 해제되었지만 그날 이후로 불면의 날들이 지속되었다. 일상생활은 멈추었고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책을 읽어도 눈으로만 읽을 뿐이고, 일주일에 몇 번을 나갔던 배구동호회 활동도 할 수 없었다. 채널을 옮기면서 뉴스만을 검색하고, 오후에는 광장으로 향하였다.

생각해 보니, 2016년 국정 농단으로 박근혜를 탄핵하기 위한 촛불집회 때도 그랬었다. 그 당시에는 외민동을 몰라서 친구, 가족들과 집회에 참석했고, 어떤 날은 혼자 나갔다. ‘비가 오니까 집회 나오는 사람이 적을 거야.’, ‘날이 너무 추워서 사람들이 없을 테니 나라도 나가야지.’라고 스스로 구실을 만들었다. 그런데 10년도 안 된 2025년에 더 심각한 상황이 일어났고, 나 역시 같은 행동을 하고 있었다. 2017년 국민들의 촛불 투쟁으로 새로운 흐름을 만들었지만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것으로 끝이었고, 더 특별한 것도 없었다. 박근혜 탄핵뿐 그 당시의 기득권 세력과 부역자들은 제대로 처벌하지 못했다. 오히려 윤석열이라는 괴물을 만들어, 검찰, 경찰 그리고 군대라는 막강한 기득권 세력을 더 키워놓았다.

말도 안되는 계엄을 막았으니, 계엄의 주동자는 곧 파면되고, 그 부역자들까지 처단될 것이라 생각했다. 너무나 당연한 수순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내란 세력과 그 동조 세력들은 온갖 수단을 동원하며, 심지어 법까지 웃음거리로 만들면서 대한민국의 기본 이념까지 무너뜨리고 있다. 보수라는 위장 가면을 벗어던진 무리들은 우익의 민낯을 ‘애국’으로 포장하면서 떠들어댄다.

이번에는 끝을 보아야 한다. 장갑차를 막아섰던 그 여성이 말한 것처럼 우리가 해내야만 한다. 우리 세대는 수많은 열사들의 죽음과 투쟁 속에서 만들어진 6.10 항쟁을 경험하였고, 민주화 운동이 대중적으로 폭발하는 시기의 세대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투쟁 경험이 없는 2~30대에게 잠시나마 ‘계엄’을 경험하게 한 것이 미안했고, 잔인하고 엄혹한 시기에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싸워 왔던 선배들에게는 우리 세대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해 다시 계엄이라는 상황을 맞게 한 것이 정말 죄송했다.

🕯️ 남태령, 광화문, 한남동…빛의 혁명이 벌어진 현장들

12.3 내란의 밤 이후로 사람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미안함을 품고, 서로가 서로의 힘이 되고자 사람들은 광장과 거리로 스스로 모였다. 서로서로 연대하고 응원하면서 목소리를 내는 2,30대의 젊은 세대뿐만 아니라 백발의 어르신들까지의 세대의 연대, 노동자, 농민, 여성 등 계층의 연대, 사회적 약자들의 연대와 참여가 높았다. 윤석열 탄핵과 내란 동조 세력 척결을 위한 ‘빛의 혁명’이 시작된 것이다.

특히 감동적인 연대의 사건은 12월과 3월의 두 번의 ‘남태령 대첩’이다. 윤석열 체포 투쟁에 함께하기 위해 12월 21일 한남동 집회로 향하던 전봉준 투쟁단의 트랙터가 남태령에서 경찰에게 막히 자 수많은 사람들이 광화문 집회 후 그 밤, 그 새벽에 남태령으로 달려가 농민들과 함께 밤샘 투쟁을 한 것이다. 나도 어떤 싸움에서든 밀리면 안 된다는 생각과 농민 투쟁단이 경찰에 의해 진압되지 않도록 함께 싸워야 한다는 생각으로 가본 적도 없는 남태령으로 그냥 갔다. 개찰구를 통과하니 혹독한 추위에 경찰과 대치하며 밤새 싸웠을 앳된 20대들이 탈진한 채로 벽을 등지고 앉아 있었다. “괜찮니?” 빠르게 상태만 살피고, 지상으로 올라가 외민동 깃발과 함께 본대열에 합류했다. ‘경찰은 차 빼! 윤석열은 방 빼!’와 같은 구호를 외치면서 대치 28시간만에 경찰의 차벽이 열리고, 트랙터를 선두로 수방사 앞을 외민동 깃발을 휘날리면서 사당까지 행진했을 때는 작은 승리의 기쁨을 느낄 수 있었다.

제일 많이 방문했던 광화문 광장. 경복궁역 4번 출구는 외민동의 만남의 장소이다. 그곳에 선배님들이 항상 먼저 와 계셨다. 집회 개근 일등 신홍민 선배님께 한번은 식사 대접이라도 하고 싶어서 여쭈었더니, ‘후두염에 걸려서 목소리가 안 나온다’는 손글씨가 적힌 메모지를 주머니에서 꺼내 보여주셨다. 계속되는 집회 참여로 컨디션이 안 좋은 상황에서도 나오신 것이었다.

공수처의 윤석열 체포가 무산되면서 집회 장소가 한남동으로 바뀌었다. 새벽에 체포할 수도 있어서 자는 둥 마는 둥,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체포했나?’를 반복하면서 지새운 불면의 날들. 경찰들은 노동자와 농민, 학생들을 잡을 때는 아주 열심이더니 내란범을 체포하는 데는 무능력이다. 윤석열 1차 체포 영장 실패 후 민노총의 한남동 관저 앞 3박4일 밤샘 집회가 있었다. 1월 4일 저녁 8시 무렵 예보에 없던 갑작스러운 대설주의보에도 불구하고 밤샘 시위를 벌인 ‘키세스 시위대’ 모습은 숙연하기까지 했다.

윤석열이 체포된 1월 15일부터 상황은 더 극으로 달려갔다. 내란을 옹호하는 무리의 발작이 법원 폭동으로 나타나고, 극우 쓰레기들의 대학가 침탈이 지속되었다. 이문동 외대 캠퍼스에 극우 쓰레기들이 난동을 부린 것은 2월 28일. 그날부터 난 극우들을 쓰레기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성능 좋은 앰프를 교문 앞에 설치하고, 들어본 적도 없는 세상의 더러운 욕설을 성적(性的) 몸짓을 섞어 지껄인다. 누군가 쥐어준 귀마개를 했음에도 고막이 떨어질 것 같다는 말이 정말 실감났는데, 극우 쓰레기들과 앞에서 함께 대치하고 있었던 파주에 살고 있는 동기 설현이는 태연한 표정이다. 귀마개를 건네자 “항상 듣는 소리여서 괜찮아.”라고 손사래를 친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설현이를 통해서 분쟁 지역에 사는 분들의 고충을 알 수 있었던 극우 침탈 저지 투쟁은 밤 9시가 넘어서야 끝났다.

3월 초가 되면 헌법재판소의 윤석열 파면 인용 소식이 들려올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는데, 아주 해괴한 재판부의 산수 계산으로 윤석열의 구속이 취소된 3월 8일. 검찰과 재판부를 믿지 않았지만 이게 말이 되는 상황인가? 지난 몇 달 동안 상식이 무너지는 경험을 했다. 당연하지 않은 것들이 당연하게 여겨지고, 부정의가 정의로 취급되는 상황들 속에서 충격이 컸었다. 헌재의 판결이 지연되면서 윤석열 파면이 안 될 수도 있다는 억측들이 나오면서 불안함이 엄습하기도 했다. 그때부터는 주말 집회가 매일 집회로 바뀌어서 몸 상태가 엉망이었다. 목 통증이 심해서 어떤 날은 립싱크로 구호와 노래를 했다. 5월이 되어 병원에서 성대결절 진단을 받으니 왜 이리 웃픈지…

✊ 이제는 이기는 싸움을 하자

우리는 이제까지 이기는 싸움을 하지는 않았다. 이긴 싸움이라 생각했던 것도 나중에 보면 아니었다. 이기기보다는 지키는 싸움을 했던 것 같다. 나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 자유와 민주를 지키기 위해, 참으로 오랜 세월을 견디면서 행동해 왔다. 이번에도 우리 국민들은 빼앗길 뻔했던 민주주의를 온몸으로 지켜냈다.

이제는 이기는 싸움을 하자. 정권교체를 이루었다고 안주해서는 안 된다. 몇 달 동안 응축시켰던 그 처절하고도 간절한 마음과 힘을 바탕으로 사회 대개혁을 이루어야 한다. 이전의 역사에서 해내지 못했던 친일, 유신 잔재 세력들과 그 부역자들을 완전히 걸러내어야 한다. 윤석열 정부의 폐단과 양당 간의 극단적인 정치 이슈 속에 노동·여성·장애·기후·성 소수자 등의 문제는 물론이고 경제·외교·사회 문제 및 북한과의 관계 역시 최악이었던 지난 3년 동안 악화되었던 문제들을 해결해야 한다. 부정의가 정의로, 비상식이 상식으로 둔갑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최소한 디딤돌이라도 놓아야 한다.

12.3 ‘내란의 밤’과 같은 비극을 반복하지 않고, 우리의 자유와 민주를 지키기 위해서, 우리가 발 딛고 있는 대한민국을 제대로 지키기 위해서 말이다. 정말 다시는 다시는 종로에서, 광화문에서 정태춘의 ≪92년 장마, 종로에서≫를 듣고 싶지 않다.

One Response to “핫이슈

  • 성대가 결절될 정도로 열심이셨군요.
    하긴, 특유의 흰색 테두리 달린 까만 벙거지 모자는 늘 투쟁 현장에 있었던 것 같네요.
    그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
    그러나, 지금 돌아가는 꼬락서니를 보니 언젠가 또 시내 중심가와 여의도 등지로 출퇴근할 때가 올 것이니 다시는 광화문에서 만나지 말자는 말씀은 (그 뜻을 왜 모르겠습니까만) 거두어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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