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있고 싶은 곳, 도꼬마리 그리고 외민동

— 이문동 ‘도꼬마리’ 13년, 박내현 동문(독일어과 94)이 외민동에서 다시 묻는 공동체

대학을 졸업한 뒤 10년 동안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았다. 다시 사회와 연결되고 싶어 시작한 일이 이문동 마을공간 ‘도꼬마리’로 이어졌고, 어느덧 13년째다. 학력과 나이, 직업이 사람을 가르는 순간에 예민했던 그는 대학 동문회에도 선뜻 마음을 열지 못했다. 그런 박내현 동문이 최근 외민동에 가입했다. 무엇이 그의 마음을 움직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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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민

편집위원장, 신문방송학과 85

후원주점을 준비하던 어느 날, 도꼬마리 사람들이 함께 볼 수 있도록 만들어둔 통장에 갑자기 입금이 이어지기 시작했다.

박내현 동문(독일어과 94)
이문동 마을공간 ‘도꼬마리’

“‘갑자기 통장에 돈이 막 쏟아져 들어오고 있어요. 무슨 일이에요?’ 이러는 거예요.”

외민동 단톡방에 후원주점 소식이 올라간 뒤 나온 질문들이었다. 그날 저녁에는 입금한 동문들의 명단을 정리해 보내달라는 연락이 왔고 다음 날도 같은 부탁이 왔다. 이유를 물어서야 알았다. 함칠성 조직위원장이 이미 후원한 사람에게 다시 전화하지 않으려고 명단을 확인해가며 동문들에게 일일이 전화를 돌리고 있었다.

“저는 뵌 적도 없고 그분들은 도꼬마리가 뭐 하는 곳인지도 모르시는데 왜 이렇게 보내주시는 거지 싶었어요. 저한테는 정말 신기한 경험이었어요.”

“활동가로 사는 일의 고단함은 늘 자신을 증명해야 한다는 데 있다”고 그는 말한다. 가장 슬플 때도 거창한 실패가 아니라 회원 한 사람이 탈퇴 연락을 해올 때다. “내가 뭘 더 해야 하나, 우리가 하는 일이 의미 없게 느껴지시나 싶어 며칠씩 마음이 무겁다”고 했다.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의 입금이 그에게 응원으로 읽힌 것은 그래서였다.

직장인에서 마을활동가로, 일상의 언어를 찾다

박내현 동문이 이문동과 인연을 맺은 것은 1994년 외대 독일어과에 입학하면서다. 1학년 2학기부터 학보사에서 활동했고, 졸업 후에는 외국어학원 IT 부서에서 10년가량 일했다. 직장을 그만둔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겹쳐 있었다. 건강이 안 좋아졌고, 돈 버는 일만 계속하는 것에 회의도 들었다. 학보사 동기 다섯 중 혼자만 일반 취업을 했다는 부채감도 오래 남아 있었다.

도꼬마리와 우리동네노동권찾기가 함께 쓰는 공간

다시 뭔가를 해보고 싶어 선배의 소개로 어느 노동조합에서 한 달 반쯤 인턴으로 일했지만 잘 맞지 않았다. 잘 몰라서 질문을 하면 ‘모르면 의견을 내지 말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서로가 평등하게 일할 줄 알았던 노동조합은 오히려 위계질서가 강한 조직이었다.

의제가 거대한 것도 마음에 걸렸다. 직장에서 만난 사람들이 사회문제에 관심이 없어서가 아니라, 먹고사는 일에 밀려 꺼내기 어려운 이야기라는 것을 그는 10년 동안 곁에서 보았다.

“나 같은 사람도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의 운동이 있었으면 좋겠다, 일상에서 내가 사는 동네에서 그런 얘기를 좀 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죠.”

2013년 서울시 마을공동체 종합지원센터에 채용돼 동대문구를 맡았다. 그런데 돌아다녀 보니 시민단체도 거의 없고 재미있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어느 날 술을 잔뜩 마시고 들어와 남편 김동원 동문에게 오늘은 정말 재미있는 게 없었다고, 그러면 우리가 하나 만들면 안 되겠느냐고 했다. 그래 만들자는 대답이 돌아왔다.

이름은 골목에서 나왔다. 첫 공간이 있던 골목이 ‘독구말 길’로 불렸는데 어원을 찾아보니 도꼬마리라는 풀이 많이 자라는 골목이라는 뜻이었다. 잘 들러붙고 숙취 해소에 좋다는 한약재였다.

“우리가 사람들한테 잘 달라붙어야 하기도 하고, 어차피 우린 맨날 술 먹고 이럴 거니까. 만장일치로 정했죠.”

같이 밥 먹는 일에서 시작된 도꼬마리 13년

2013년 가을 문을 열고 처음 한 일은 학교에서 하던 방식 그대로 강좌였다. 지금 대학에서 가르치지 않는 것을 공부해보자며 동문 선배들을 모셔 마르크스 강의를 열었는데, 뜻밖에 주민 열 명 남짓이 찾아왔다. 그 자리에 왔던 동네 청년들에게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물었더니 대답은 강좌가 아니었다.

“밥을 같이 먹었으면 좋겠다는 거예요. 혼자 밥 먹는 게 너무 힘들다고.”

‘토요일엔 모여서 밥먹어요’ — 그날의 메뉴를 적어 내건 입간판
누구든 들어와 함께 먹었다

그래서 토요일마다 밥을 먹기 시작해 3년을 보냈다. 경동시장에서 장을 보고 입간판에 그날 메뉴를 적어두면 누구든 들어와 함께 먹었고, 남은 음식은 혼자 사는 사람들이 싸갈 수 있게 했다. 아이를 맡길 곳이 마땅치 않은 부모들이 찾아오면 공간을 내주었고 방학 중에는 동네 아이들에게 밥을 먹였다. 영화를 틀고 싶다는 사람이 있으면 작은 영화제를 열었고, 걷고 싶다는 사람이 생기면 중랑천을 함께 걸었다.

도꼬마리가 무엇을 하는 곳이냐는 질문에 그는 여전히 답하기 어렵다고 한다.

“사람들이 자기가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자기가 있고 싶은 곳에 있었으면 좋겠다. 정말 딱 그 정도의 지향이 있는 거예요.”

첫 골목은 재개발 지역이 됐다. 이주비를 받을 수 있다는 것조차 모르는 세입자가 많아 공인중개사를 모셔 함께 강의를 들었고, 이주가 시작되자 구청이 쓰레기를 치우지 않아 영상을 찍어 제보하고 구의원과 조합을 불러 주민 간담회를 열었다. 이웃이 모두 떠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마지막으로 이사했고, 그 전에 외대역 광장에서 골목 사진전 ‘마을의 문, 이문(里門)을 기억하다’를 열어 주민들이 자기가 살던 골목의 사진을 가져가게 했다.

영화를 틀고 싶다는 사람이 생기면 작은 영화제를 열었다
골목 사진전 ‘마을의 문, 이문(里門)을 기억하다’ (2018년 11~12월, 외대역 광장)

이사한 지 한 달쯤 지나 혼자 그곳을 다시 찾아갔을 때, 골목은 공터처럼 변해 있었고 통유리는 깨져 있었다.

“그 공간에서 펑펑 울었어요. 왜 그렇게 눈물이 났는지 모르겠어요. 우리 의사와 상관없이 떠밀려서 그렇게 된 게 되게 힘들었나봐요.”

그때도 그만둘지 고민했지만 회의를 열자 스무 명쯤이 모여서 이대로 없어지는 것은 아쉽다고 했다. 다시 돈을 모아 2019년 지금의 공간으로 옮겼는데, 개소식을 하자마자 코로나가 시작됐다. 온라인으로 바느질까지 해가며 버텼지만 부침이 길었다. 다시 기운을 낸 것은 10주년이던 2023년이다. 그날 어린 시절 도꼬마리에서 밥을 먹던 아이들이 대학생이 되어 돌아왔고, 한 아이가 노래를 불러도 되느냐고 물었다. 밥을 얻어먹던 아이가 자라 노래하는 것을 사람들이 둘러앉아 들었다.

30대였던 회원들이 40대 후반이 되고 그때 초등학생 아이를 키우던 어머니들이 50대가 되면서 공간도 함께 달라졌다. 관심은 청년의 외로움에서 부모 돌봄과 자신의 몸, 노년과 죽음으로 옮겨갔다. 요즘은 회원 중에 악기를 다루는 사람이 기타를 가르치고, 요가 지도자 과정을 마친 사람이 요가를 연다. 돌봄과 죽음을 주제로 한 책 모임도 재작년부터 이어지고 있다. 그 자리에서 나온 이야기를 따라 박 동문은 올해 한겨레두레협동조합의 채비 플래너 과정을 공부했다. 가족이 아니어도 상주를 지정할 수 있도록 제도가 바뀌고 있으니, 혼자인 회원에게 그런 자리를 내주는 공간이 되어보자는 것이다.

올해 1월에는 건물이 경매에 넘어갔다. 후순위라 보증금을 돌려받기 어려울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박 동문은 이번에도 사람들이 그만하자고 하면 그것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오래 하기도 했고 이 정도 재미있었으면 됐고, 제가 하고 싶다고 혼자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요.”

그런데 이번에도 사람들이 먼저 움직였다. 하지 않기로 했던 후원주점도 세 번째 회의에서 찬반 토론 끝에 열기로 했다. 그가 그만해도 된다고 생각할 때마다 오히려 주변 사람들이 도꼬마리를 붙들었다.

15년 활동가가 가장 경계하는 것, ‘내가 해봤는데’

마을은 그가 사람을 보는 방식도 바꾸었다. 어느 대학을 나왔는지, 무슨 일을 하는지 굳이 묻지 않는다. 직업 역시 한국 사회에서는 위계를 만들 수 있어 먼저 묻지 않는다는 암묵적인 약속이 있다.

“복지는 내가 못 가진 걸 증빙해야 지원을 받잖아요. 마을은 그렇지 않아요. 저희 안에 기초생활수급자도 계시고 혼자 사시는 어려운 분도 계시지만, 그게 그 사람의 정체성으로 드러나지 않아요. 그냥 제가 만나는 n분의 1의 멤버인 거죠.”

도꼬마리에서 열린 인권 강좌

요즘 그는 성평등과 청소년 인권을 주제로 강의를 다닌다. 대학을 가지 않은 실업계고 졸업 청년들과 활동하면서는, 자신에게는 아무렇지도 않았던 질문이 누군가에게는 상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몇 학번이냐, 전공이 무엇이냐는 평범한 질문 앞에서 그들은 왜 자신이 대학에 가지 않았는지를 매번 다시 설명해야 했다.

그래서 가장 경계하게 된 것은 오히려 자신의 경험이다. 활동 경력이 15년쯤 됐고 도꼬마리를 처음 만든 사람이기도 하다. 중요한 결정을 할 때 그가 먼저 의견을 말하면 다른 사람들이 그쪽으로 쉽게 기운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회의에서는 되도록 마지막에 말한다.

“제가 가진 경험이나 시간이 소중하긴 하지만 이게 내 힘으로 쓰이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처음 마을에 왔을 때 어느 단체 대표에게 동대문구에 몇 년 살았느냐, 근본이 없다는 말을 들었던 기억도 남아 있다. 이제 자신이 거꾸로 새로운 사람 앞에서 내가 해봤는데, 라고 말하는 사람이 되지 않을까 경계한다.

박내현 동문은 스스로에 대해 극내향형이라고 털어놓았다. 혼자 있는 것을 가장 좋아하고 모르는 사람과 오래 이야기하는 일을 어려워해서, 마을 사람들에게 너는 속 얘기를 안 해서 서운하다는 말을 오래 들었다. 그런데 13년을 함께 보내는 사이 어느 날 다른 이들처럼 편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되었다. 도꼬마리는 그녀의 성향마저 변화시킨 존재인 셈이다.

차별금지법 제정을 촉구하는 유세단 활동

누구까지 ‘우리’일까

박 동문이 오랫동안 외민동 가입을 망설였던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우리 사회에 계급적 위계도 있고 나이의 위계도 있고 젠더 위계도 있잖아요. 그런 걸 하지 말자고 제가 강의도 하러 다니는 사람인데, 동문회에 가면 어쨌든 학번으로 한 줄로 서게 되니까요.”

학력 차별에 반대하는 활동을 하면서 ‘대학 동문회’에 들어가는 일 자체도 쉽게 마음이 가지 않았다. 학창시절에도 비슷한 생각을 했다. 당시 학보사는 이문캠퍼스와 용인 왕산캠퍼스(현 글로벌캠퍼스) 학생들이 함께 활동했지만 회의는 주로 이문동에서 열렸고 왕산 학생들이 매번 이동했다. 분기에 한 번은 왕산에서 하자는 이야기가 나왔지만 그것으로 충분한가 하는 생각이 남았다. 누군가가 당연하게 감수하는 불편이 있고, 그 불편이 왜 늘 같은 사람의 몫인지 돌아보게 된 경험이었다.

그런 그에게 최근 외민동 안에서 오가는 ‘우리의 범위는 어디까지인가’라는 질문도 가볍지 않다. 이문캠퍼스와 글로벌캠퍼스, 학부와 대학원, 사이버대학을 두고 어디까지를 같은 공동체로 볼 것인지를 가르는 문제다.

그는 동문회가 학번을 완전히 벗어날 수 있다고 보지는 않는다. 학번 자체가 순서를 만들고 어느 정도 위계가 생기는 것도 현실이라고 본다. 중요한 것은 그 순서가 발언권이나 영향력의 크기가 되지 않는 것이다. 의견이 첨예하게 갈리거나 중요한 결정을 할 때에는 평소 익숙했던 관계의 질서가 힘으로 작동할 수 있다고 그는 말한다. 그래서 오래된 선배들이 먼저 그 문화를 열어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누가 더 외대다운 동문인가’를 가르는 일에 대해서도 생각은 분명하다.

“우리가 바꿔 나가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 중에 학력에 따른 차별이나 직업에 따른 차별도 있는 거잖아요. 그렇다고 하면 우리 안에서만이라도 대학원이든 사이버대학이든 외대라는 바운더리 안에 들어오면 누구라도 같이 할 수 있다고 열어놓는 게 더 지향에 맞지 않을까 생각해요.”

실망이라기보다 기대에 가깝다. 자신이 중요하게 여겨온 가치와 외민동이 말해온 가치가 닮아 있어서, 오히려 외민동 안에서 먼저 물어보고 싶다는 것이다.

외민동에서 다시 발견한 ‘사람을 잇는 계기’

그럼에도 그를 움직인 것은 결국 사람이었다.

지난해 김동원 동문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을 때 따로 알리지 않았는데도 외민동에서 조기를 보내줬다. 자신은 가입도 하지 않았는데 세심하게 신경 써주는 외민동에 대해 감사한 마음에 가입해야지 하면서 시간이 흘렀다.

결국 가입한 것은 후원주점을 준비하던 그 무렵이다. 주점 날에는 도꼬마리에서 13년을 함께한 사람들과 그곳을 처음 찾아온 외민동 동문들이 한 공간에 섞였다. 외민동 합창단이 노래했고 김동원 동문은 기타를 쳤다. 박 동문은 주방에서 설거지를 했다.

13년을 함께 보낸 도꼬마리 사람들

가입한 뒤에는 단톡방을 유심히 읽는다. 가입 인사보다 어떤 사안이 올라왔을 때 사람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가 궁금하다고 했다. 시민단체 활동가들 단톡방도 이렇게 하루 종일 이야기하지 않는다며 동기에게 여기는 왜 이렇게 진지하냐고 물어본 적도 있다.

활동을 오래 하다 보면 자신이 중요하다고 여기는 문제에 세상은 별 관심이 없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런데 팔백 명 넘는 동문들이 저마다의 자리에서 사회문제를 두고 이야기하는 것을 보며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사람들이 관심이 없는 게 아니라 계기를 못 찾는 걸 수도 있겠다 싶더라고요.”

요즘 그의 고민은 우리 안에서 다름을 어떻게 이야기할 것인가다. 예전에는 옳고 그름으로 설득이 됐지만 지금은 그것으로는 아무도 설득되지 않는다. 우리가 꿈꾸는 다른 세상을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알아듣고 손에 닿는다고 느끼는 말로 바꿔 말할 수 있을까. 13년 전 나 같은 사람도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를 찾던 사람이 지금도 같은 질문 앞에 서 있다. 그리고 그 답의 실마리를 요즘 동문회에서 조금씩 찾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그가 외민동에 바라는 것도 그래서 거창하지 않다. 모두가 안전하다고 느끼는 곳, 이런 곳이 또 있구나 싶은 곳, 도꼬마리 말고 또 하나의 공동체로 남아주는 것이다.

“저는 마을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또 인권활동을 통해 홈리스와 이주민을 만나면서 저의 세계가 넓어져간다고 생각해요. 동문회에 오신 동문분들도 외대민주동문회를 통해 각자의 세계가 넓어지는 계기가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저 역시 이곳에서 또 다양한 분들과 다양한 경험을 하면서 그렇게 나아가고 싶습니다.”

세 번째 공간이 어디가 될지는 아직 아무도 모른다. 다만 어디가 되든, 지금 도꼬마리에 붙어 있는 사람들이 함께 옮겨갈 것이다.

“각자의 세계가 넓어지는 계기가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사진·영상 차재훈 동문(포르투갈어과 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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