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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마 밑에서 ― 故 양윤경 동지를 보내며

작성자
강 민신
작성일
2026-04-28 11:57
조회
64

처마 밑에서

― 故 양윤경 동지를 보내며

윤경아.

부음을 받고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었다. 1990년대 초반, 외대 민주동문 모임 자리에서 너희가 축가를 부르던 그 한순간이 갑자기 어제 일처럼 또렷해지더라. 무대 위의 너는 강렬했고, 그 인상이 오래 남았다. 후배에게 부탁해 카페에서 차 한잔의 시간을 얻어냈고, 마주 앉아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거의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너의 노래와 그 안에서 뿜어져 나오던 에너지를, 내가 어설픈 말로 칭찬하고 격려했던 분위기만 남아 있다. 그 짧은 한순간이 너를 떠나보내는 오늘에야 이렇게 다시 도착할 줄은 몰랐다.

오늘은 종일 네가 부른 〈우산〉을 듣고 있다.

https://youtu.be/nTipyZAyH9M?si=i8nGqkIZxguIK_3n

그 노래의 화자가 사람이 아니라 우산이라는 것을, 비 오는 날 처마 밑과 정류장과 가로등 아래에서 끝없이 누군가를 기다리는 도구라는 것을, 새삼 다시 듣는다. 여름의 굵은 빗방울에서 가을의 가랑비, 겨울의 진눈깨비로 비는 점점 차가워지고 그대를 맞으러 오는 사람도 점점 지쳐 가는데, 화자는 자리를 뜨지 않는다. 그리고 비가 다 갠 맑은 세상이 와도 영광은 약속되지 않는다. 신장 한구석에 세워진 채 잊혀지고, 전철 좌석에 홀로 남겨질 뿐이다. 그럼에도 다시 어려운 날이 오면 또 다른 누군가의 머리 위에 자기 몸을 펼치겠다는 꿈을 꾼다. 보상도 인정도 전제하지 않은 헌신, 잊혀짐을 이미 받아들인 헌신.

너는 이 노래를 그저 부른 게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윤경아. 솔직히 말하면 나는 너를 보내며 슬픔보다 더 큰 분노 같은 것이 가슴에서 올라온다. 운동을 하던 시절, 자기 청춘을 송두리째 내어놓고 헌신했던 그 수많은 동지들이 비 갠 뒤 신장 속의 우산처럼 한구석에 세워진 채 잊혀져 갔다. 누구도 그들의 안부를 묻지 않았고, 누구도 그들의 병상을 지키지 않았고, 누구도 그들의 빈자리를 채워주지 않았다. 너의 남편 윤민석이 트위터에 한 줄을 올리기 전까지, 너의 투병조차 우리는 알지 못했다. 너의 노래가 그토록 많은 시위 현장의 머리 위에 펼쳐졌건만, 정작 너를 가려줄 우산은 어디에도 없었다는 사실이 오늘 가장 아프다.

비 그친 뒤 잊혀진 우산들에게, 우리는 한 번이라도 제대로 고맙다는 인사를 건넨 적이 있었던가. 너무 오래 받기만 했다.

윤경아.

너는 이제 그 무거운 우산을 내려놓고 가도 된다. 어려운 날이 다시 와도 이번엔 네가 펼쳐질 차례가 아니다. 남은 우리들이, 너의 노래에 빚진 우리들이, 서로의 머리 위에 자기 몸을 펼치며 살아갈 차례다. 그것이 너에게 드리는 마지막 약속이다.

30년 전 카페 건너편에 앉아 있던 그 에너지를, 나는 끝까지 잊지 않을 것이다.

부디 편히 쉬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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