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연극] 박제 — 그 동네, 그 무대, 그리고 '우리'라는 허상에 대하여
작성자
강 민신
작성일
2026-04-16 23:03
조회
3
박제 — 그 동네, 그 무대, 그리고 '우리'라는 허상에 대하여
그 동네에 대하여
성균관대학교 앞에서 버스를 내렸을 때, 가장 먼저 찾아온 것은 연극에 대한 기대가 아니라 오래된 기억의 냄새였다. 이 동네에서 나는 대학원을 다녔고, 논문을 쓰고 졸업장을 받았다. 서울대학교병원 자회사에서 일하기도 했고, 친구와 작은 회사를 동업으로 꾸려보기도 했다. 대학로라는 이름이 품고 있는 젊음과 열정의 이미지와는 조금 다른, 생활인으로서의 땀과 고단함이 배어 있는 동네. 그래서 이 거리를 걸을 때면 향수라기보다는 차라리 지나온 시간의 무게 같은 것이 발밑에서 올라온다.와이프와 함께 사무실에서 일찍 나와 버스를 탔다. 대충 극장의 위치를 확인하고 나서, 곧 도착한 지인 형과 합류했다. 셋이서 근처 식당에 들어가 저녁을 먹었다. 특별할 것 없는 식사였지만, 공연 전의 식사라는 것이 묘하게 의례적인 느낌을 만들어낸다. 마치 어떤 경험을 위한 준비 의식 같은 것.
씨어터쿰, 작은 극장의 풍경
씨어터쿰. 종로구 창경궁로 지하에 자리한 이 작은 극장에 도착했을 때, 입구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일찍 온 탓이다. 예약을 확인하고 입구에서 담소를 나누며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관객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하면서 출입구가 북적거리기 시작했는데, 분위기가 독특했다. 여기저기서 안부를 묻는 소리, 반가워하는 인사, 서로의 근황을 나누는 목소리들. 관객 대부분이 극단 관계자이거나 배우들의 지인인 듯했다. 서로를 아는 사이들이 모여 한 편의 연극을 함께 보러 온 풍경. 이것이 소극장 연극의 현실이다. 화려한 대형 무대의 익명적 관람과는 다른, 날것의 친밀함이 여기에는 있다. 그 친밀함이 때로는 따뜻하고, 때로는 씁쓸하다.연출을 맡은 고건령 감독이 직접 나와 관객을 안내했다. 착석 전 그가 던지는 유머 섞인 멘트들이 재미있기도, 썰렁하기도 했다. 조금은 특이한 사람이라는 인상. 하지만 그 어색한 웃음이 오히려 관객과 무대 사이의 거리를 좁혀주는 역할을 했다. 대형 공연이었다면 있을 수 없는 장면이다. 연출가가 직접 관객 앞에 서서 농담을 던지는 이 풍경 자체가, 소극장이라는 공간이 가진 힘이다.
무대가 열리고
감독의 사인과 함께 연극이 시작되었다. 무대 위에는 연무가 깔려 있었다. 그것이 묘한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안개처럼, 혹은 지워지지 않는 과거의 잔상처럼.연극 「박제 — 한 여자 이야기」는 한국 근현대사의 비극을 한 가족 삼대에 걸쳐 풀어낸다. 2023년 국회의원 선거를 앞둔 후보자 이철훈에게 어머니에 대한 루머가 터지고, 그는 일본에 있는 어머니를 찾아가 가족의 역사를 마주한다. 독립군 출신 할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으로 쓰러졌고, 노동운동가였던 아버지는 고문 후유증으로 정신병원에서 생을 마감했으며, 생활고에 시달리던 어머니는 요정의 주방 보조로 들어갔다가 결국 일본인 현지처로 낙인이 찍힌다. 거대한 역사의 수레바퀴 아래 깔린 한 여자의 일생. 그녀는 박제되었다. 시대가 만들어낸 프레임 안에, 타인들의 시선 안에, 그리고 '우리'라는 말이 한 번도 그녀를 포함하지 않았던 공동체의 무관심 안에.
연기와 연출에 대하여
배우들의 연기는 수준 이상이었다. 몇몇 배우는 높은 연기력을 유감없이 보여주었고, 음악과 영상 등 미디어 활용도 효과적이었다. 무엇보다 이야기의 흐름이 좋았다. 한순간도 지루한 순간이 없이 극적 긴장을 잘 끌고 나갔다. 중간중간 삽입된 코미디적 요소들도 적절한 맛을 냈다. 무거운 이야기일수록 웃음의 환기가 필요한 법인데, 그 균형을 잘 잡았다.다만 마지막 갈등의 해소 방식은 이미 예상했던 바였다. 약간의 허무함이 스쳤지만, 돌이켜 생각하면 그래서 오히려 무난했고 깔끔한 마무리였다. 연극에서 결말의 반전이 반드시 미덕은 아니다. 예측 가능하더라도 그 과정이 충실하면 관객은 충분히 설득된다. 이 연극은 그 과정의 충실함으로 승부한 작품이다.
여운, 그리고 귀가
옆을 보니 와이프가 극에 완전히 몰입해 있었다. 계속 훌쩍이고 있었다. 한 여자의 기구한 삶에 공감한 것이리라. 아니면 그 여자를 둘러싼 세상의 무심함에 분노한 것일 수도 있다. 물어보지는 않았다. 어떤 감동은 물어보는 순간 가벼워지는 법이니까.극장 문을 나서며 지인 형이 말했다. "재밌었다. 내가 본 연극 중에 두 번째로 재미있었어." 첫 번째가 뭐였냐고 묻고 싶었지만 묻지 않았다. 그것도 물어보는 순간 이 밤의 여운이 달라질 것 같았으니까.
우리는 간단히 뭔가 먹고 갈까 하는 유혹을 뿌리치고 각자 집으로 향했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배속이 좋지 않아 빨리 가고 싶었던 것이기도 했다. 감동과 위장은 별개의 문제다.
'우리'라는 말의 무게
돌아오는 길에 연출가 고건령의 말이 떠올랐다."우리가 기억조차 하지 않는 누군가의 뼈와 살이, 내가 딛고 선 지반을 구축하고 있다."
그리고 극 중 마지막에 한 여자가 내뱉는 말.
"살아보니 세상에 '우리'는 없었네."
'우리'라는 말은 한국어에서 가장 따뜻한 말 중 하나다. 우리 가족, 우리 동네, 우리나라. 하지만 그 '우리' 안에 들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 독립을 위해 싸운 자의 후손이, 독재에 맞선 자의 가족이, 생활고에 내몰린 여자가 '우리'의 바깥으로 밀려난다. 그리고 세월이 흐른 뒤, 그들은 박제된다. 살아 있었던 존재가 아니라 굳어버린 표본으로. 누군가의 정치적 약점으로, 유튜브 루머의 소재로.
작은 극장에서 시작된 이 이야기가 결코 작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2026년 3월 4일, 씨어터쿰에서 연극 「박제 — 한 여자 이야기」를 관람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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