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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봇이 파업할 수 없는 이유 — 피지컬 AI 시대, 노동권의 존재론적 위기
[시리즈] AI와 일자리 그리고 민노총
— 2025년 4월 민주노총-대통령 간담회를 기점으로, 피지컬 AI 시대 노동권의 재구성 문제를 20회에 걸쳐 다룹니다.
기술 전환의 속도와 노동운동의 대응 사이에 벌어지는 간극을, 역사·제도·현장·국제비교의 시선으로 짚어봅니다.

로봇이 파업할 수 없는 이유 — 피지컬 AI 시대, 노동권의 존재론적 위기
2025년 4월, 이재명 대통령과 민주노총의 간담회가 열렸다. 노동존중, 사회적 대화, 비정규직 문제 — 익숙한 의제들이 오갔지만, 이번 간담회에서 유독 무게감 있게 등장한 단어가 있었다. 피지컬 AI다.
양경수 민주노총 위원장은 이렇게 말했다. "피지컬 AI의 도입은 일자리의 변화가 아니라 소멸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그간의 대책과는 달라야 한다." 이재명 대통령은 "피할 수 없다"고 전제하면서도 스마트팩토리 도입 시 오히려 고용이 늘었던 사례를 들어 공포감을 누그러뜨리려 했다. 양측 모두 피지컬 AI를 정면으로 언급했다는 점에서 이전 정부들과는 결이 다르다. 그러나 이 대화의 이면에는 아직 충분히 다뤄지지 않은, 훨씬 더 근본적인 질문이 있다.
로봇은 파업할 수 없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문제다.
노동권은 왜 존재하는가 — 대체 불가능성이라는 전제
노동삼권 — 단결권, 단체교섭권, 단체행동권 — 의 논리적 전제는 무엇인가. 그것은 노동자가 노동을 철회할 수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 철회가 사용자에게 실질적 손실을 야기한다는 사실이다. 파업이 권리로서 의미를 갖는 것은 노동자의 신체적 수행 없이는 생산이 멈추기 때문이다. 노동권의 실효성은 궁극적으로 노동자의 대체 불가능성에 기초한다.
이것은 단순한 경제학적 명제가 아니다. 근대 노동법의 역사 전체가 이 전제 위에 서 있다. 19세기 영국의 단결금지법(Combination Acts) 폐지에서 바이마르 공화국의 노동권 헌법 명문화에 이르기까지, 노동자가 집단적으로 노동을 멈출 수 있다는 사실 — 그리고 그 멈춤이 자본에 대한 유일한 실효적 압력 수단이라는 사실 — 이 노동법 체계 전체의 존재 이유였다.
피지컬 AI는 바로 이 전제를 침식한다. 로봇이 파업 노동자를 물리적으로 대체할 수 있게 되는 순간, 파업은 더 이상 사용자에게 실질적 비용을 부과하지 못한다. 형식적으로 노동삼권이 헌법에 남아 있더라도, 그것은 칼날 없는 칼이 된다.
스마트팩토리와 피지컬 AI는 같은 범주가 아니다
이재명 대통령이 간담회에서 든 스마트팩토리 사례는 일정한 사실적 근거가 있다. 생산라인의 디지털 전환 — 센서 부착, 데이터 기반 품질 관리, 공정 자동화 — 은 기존 숙련 노동자의 경험적 지식을 시스템 설계와 유지보수에 재투입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여기서 노동자는 대체되는 것이 아니라 역할이 전환되었고, 경우에 따라 관리 인력 수요가 늘어나기도 했다.
그러나 피지컬 AI는 질적으로 다른 국면이다. 스마트팩토리가 노동자의 인지적 판단을 보조하거나 확장한 것이라면, 피지컬 AI — 휴머노이드 로봇, 자율 물류 시스템, 산업용 다관절 로봇의 차세대 — 는 노동자의 신체적 수행 자체를 모사하고 대체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 차이는 결정적이다. 스마트팩토리에서 노동자는 시스템의 설계자이자 감독자로 남았다. 피지컬 AI에서 노동자는 시스템의 학습 데이터 제공자로 전환된다. 숙련 노동자의 동작을 캡처하고, 그것을 로봇에 이식하고, 이식이 완료되면 원본 — 즉 노동자 — 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대통령이 "숙련 노동자의 협조 없이 불가능하다"고 한 것은 맞지만, 그 협조의 최종 산물이 자기 자신의 대체라는 역설을 함께 말하지는 않았다.
존재론적 위기 — 노동자성 자체의 소멸 가능성
문제는 고용의 양적 감소에 그치지 않는다. 피지컬 AI가 제기하는 진짜 위기는 노동자라는 범주 자체의 존재론적 위기다.
현행 노동법 체계는 '근로자' 개념을 중심으로 구축되어 있다. 사용종속관계, 임금, 근로시간 — 이 세 요소가 근로자성을 판별하는 기준이다. 그런데 피지컬 AI가 광범위하게 도입되면, 생산 현장에서 사용종속관계에 놓이는 인간의 수 자체가 줄어든다. 노동법이 보호할 '근로자'가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플랫폼 노동에서 이미 예고된 문제의 극단적 확장이다. 플랫폼 노동자의 노동자성 인정 투쟁은, 자본이 노동자를 '독립 계약자'로 재분류함으로써 노동법의 적용을 회피하는 전략에 대한 대응이었다. 피지컬 AI는 이 회피 전략의 완성형이다 — 재분류할 필요조차 없이, 인간 노동 자체를 제거하는 것이니까.
민주노총이 현재 특수고용·플랫폼 노동자의 노동자성 인정에 매진하고 있는 것은 옳다. 그러나 그 투쟁의 시간적 지평이 어디까지인지를 동시에 물어야 한다. 노동자성을 인정받는 데 10년이 걸리는 동안, 노동자성을 인정받을 인간 자체가 생산 현장에서 사라지는 속도가 더 빠르다면, 그 승리는 빈 성을 점령하는 것이 된다.
민주노총의 '노동영향평가' 제안 — 가능성과 한계
양경수 위원장이 제안한 노동영향평가는 현 시점에서 가장 구체적인 제도적 대응이다. 환경영향평가가 개발 사업의 환경 비용을 사전에 가시화하듯, 자동화 투자의 고용 비용을 사전에 추정하고 전환 계획을 의무화하자는 것이다.
이 제안의 장점은 AI 도입 자체를 막는 것이 아니라 조건을 부과한다는 점이다. 도입의 속도를 늦추는 것도 아니고, 도입에 따른 사회적 비용의 배분을 사전에 합의하자는 것이다. 현실 정치에서 수용 가능한 범위 안에 있다.
그러나 한계도 분명하다. 노동영향평가가 효력을 가지려면 평가 결과에 법적 구속력이 있어야 한다. 환경영향평가도 초기에는 권고적 성격에 그쳐서 사실상 요식행위였던 역사가 있다. "평가는 하되 결과는 무시한다"가 반복되면 노동영향평가는 AI 도입을 정당화하는 면죄부로 전락할 수 있다.
더 근본적으로, 노동영향평가는 개별 기업·개별 사업 단위의 도입을 규율하는 도구다. 그러나 피지컬 AI가 야기하는 변화는 산업 전체, 나아가 경제 체제 전체의 변환이다. 미시적 규율 도구만으로는 거시적 전환에 대응할 수 없다.
진짜 질문 — 노동 없는 생산에서 노동권은 무엇이 되는가
결국 피지컬 AI가 던지는 질문은 이것이다. 인간의 신체적 노동 없이 생산이 가능한 세계에서, 노동을 매개로 구성되어 온 권리·분배·사회적 지위의 체계를 어떻게 재구성할 것인가.
이것은 노동운동의 전통적 프레임 — 임금 인상, 근로조건 개선, 고용 안정 — 으로는 포착할 수 없는 질문이다. 임금을 올려 달라고 할 수 있는 노동자가 존재해야 임금 투쟁이 성립한다. 근로조건을 개선해 달라고 할 수 있는 일터가 존재해야 산업안전 투쟁이 성립한다. 피지컬 AI는 이 전제들 자체를 해체한다.
민주노총이 — 그리고 한국의 노동운동 전체가 — 이 질문에 어떤 답을 내놓을 수 있느냐가, 향후 10년간 노동운동의 존재 이유를 결정할 것이다. 단순히 AI 도입에 반대하는 것은 답이 아니다. 그것은 방직기를 부수었던 러다이트의 반복이 아니라, 방직기 이후에도 노동자가 권리의 주체로 남을 수 있었던 역사적 경험을 참조해야 한다. 러다이트 운동이 실패한 뒤, 차티스트 운동이 참정권을 요구하고 노동조합이 법적 인정을 받기까지 반세기가 걸렸다. 그 반세기 동안의 고통을 반복할 것인가, 아니면 전환의 설계에 처음부터 참여할 것인가.
간담회에서 이재명 대통령이 "연구를 해 달라"고 했을 때, 그것이 단순한 정책 위탁이 아니라 권력의 재배분에 대한 협상 초대로 읽혀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리고 그 초대에 응하되, 테이블 위에 올려놓을 의제의 수준을 — 임금이나 근로조건이 아니라 생산 이득의 소유권과 의사결정 구조의 재편으로 — 끌어올리는 것이 민주노총의 과제다.
로봇은 파업할 수 없다. 그러나 로봇의 도입 조건을 결정하는 테이블에 앉을 수는 있다. 문제는 그 의자가 누구에게 주어지느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