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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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시작된 길, 베를린에서 계속 걷다

정선경 동문(신방과 83학번), 30년간 이어온 평화와 통일을 향한 변함없는 실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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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민동

편집자

“항상 배낭을 메고 있는 것 같다”는 표현으로 자신의 삶을 설명하는 정선경 동문. 독일 베를린에서 베를린한반도평화통일음악회, 한반도평화염원자전거투어, 평화의 소녀상 지키기활동 등을 통해 독일 사람들에게 한반도 분단 현실을 알리고 평화 메시지를 전하는 일을 해온 그녀의 이야기는 단순한 이민자의 성공담을 넘어선다. 외대에서 시작된 그녀의 정치적 DNA는 베를린 한복판에서도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다.

🧱➡️💔🤰🏻 통일 직후 베를린, 임신부의 고군분투기

1992년 임신 중인 몸으로 남편의 유학을 따라 베를린에 도착한 정선경 동문. 당시 독일 통일 직후의 혼란으로 6개월 동안 7번이나 이사를 다녀야 했던 고단한 시작이었다.

“92년도에 내가 왔을 때는 베를린이 동서로 나뉘어 있다가 막 합쳐지는 상황이었어요. 집 구하기가 정말 어려웠고, 임신한 상태로 의료보험도 가입할 수 없어서 막막했죠.”

특히 의료보험 문제는 그녀에게 독일 사회의 현실을 깨우쳐준 첫 번째 충격이었다. 학생이 아니면 공보험 가입도 불가능했던 상황이었고 보험 가입이 된다 하더라도 임산부는 기존 질병을 가진 것으로 분류되어 임신과 출산은 보험적용이 안되었다.

“한국에서 생각할 때는 서독, 독일 하면 선진국이니까 모든 게 다 잘 될 줄 알았는데, 막상 와보니까 그렇지 않더라고요. 의료보험만 해도 그렇고, 돈이 있어도 집을 구할 수 없는 상황이었어요. 한국보다 처음 정착하기는 쉽지 않았어요.”

이런 경험은 그녀에게 ‘선진국’이라는 것이 단순히 경제 지표로만 판단할 수 없다는 깨달음을 주었다. 하지만 위기는 곧 기회가 되었다. 동반 비자가 없던 시절, 학생으로 등록해야만 독일에 머물 수 있었던 그녀는 베를린 국립 예술대학교에서 ‘사회 및 경제 커뮤니케이션’을 전공하게 되었다.

“이 과는 독일에 하나밖에 없는 특별한 전공이었어요. 히틀러 시대 선전학과에서 시작되어 시대 변화와 함께 발전한 분야죠. 한국인으로는 제가 아마 최초일 거예요.”

어쩔 수 없이 시작한 공부였지만 석사과정까지 마쳤고, 이는 후에 그녀의 다양한 문화 활동의 든든한 바탕이 되었다.

🇰🇷➡️🇩🇪 87년 평민당 당보실에서 베를린 시민운동까지

정선경 동문의 활동 근간에는 1987년 대선 당시 평민당 김대중 후보 캠프에서의 경험이 자리하고 있다. 학창시절부터 학생운동권 출신이었던 그녀는 외대 신방과 83학번으로 졸업 후 자연스럽게 정치 현장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87년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 선거 캠프의 평민당 당보실에서 기자로 일했어요. 그때는 인터넷이 없었으니까 김대중 대통령의 즉석 연설을 작은 테이프 녹음기로 녹음해서 사무실로 가져와 타자기로 풀어썼어요. 그리고 을지로인쇄소에서 활자를 뽑는 방식으로 신문이 만들어졌는데 교정을 보느라 사흘 밤을 새우곤 했죠. 녹음하기위해 연단에올라 수백만 명이 운집한 보라매공원 유세현장의 분위기를 직접 경험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해요. 또 처음으로 비행기를 타고 제주도 유세까지 따라갔던 순간도 잊을 수 없어요.”

대선이 끝난 후에는 1988년 13대 국회에 초선으로 당선된 의원의 사무실에서 비서로 일했다. 노무현 대통령도 이때 초선 의원이었다. 이런 경험은 독일에서도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2002년, 한국으로 잠시 귀국했던 그녀는 이때도 가만있지 않았다. 87년 대선 때 함께 일했던 김현미 장관(당시 언니)의 제안으로 진대제 후보의 경기도지사 선거에서 후보부인 담당 업무를 맡았고, 분당에 거주하며 성남 YMCA 사업위원으로도 활동했다. 또한 여러 대학에서 강의를 하며 학문적 활동도 병행했다.

하지만 그녀는 아이들 교육 때문에 다시 독일로 가기로 했다. 큰아이가 바이올린 영재로 베를린 음대 예비학교에 다니고 있었는데, 한국에서는 악기 교육비가 너무 많이 들었던 것이다.

“독일에서는 예비학교에 들어가면 교수 레슨도 반주자도 모두 무료였어요. 한국은 잘할수록 돈이 더 들어가는데, 독일은 정반대였죠. 그리고 교육 스타일도 달랐어요.”

결국 아이의 음악적 재능을 키워주기 위해 베를린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했고, 이후 독일에 정착하게 되었다. 그렇게 87년 민주화 운동의 현장에서 체득한 시민의식과 참여 정신이 베를린 땅에서도 꾸준히 발현되고 있는 셈이다.

🥬➡️🕊️ 김치축제부터 평화의 소녀상까지, 10개 단체 종횡무진

현재 정선경 동문은 한독문화예술교류협회 대표를 비롯해 무려 10여 개의 단체에서 핵심 역할을 맡고 있다. 베를린평화김치축제위원장, 베를린한반도평화통일음악회 총감독, 베를린평화의소녀상대책위 위원 등 그녀의 이력은 한 사람이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방대하다.

“여기 독일 동포사회는 특별해요. 60-70년대 온 파독 간호사, 광부들이 1세대이고, 그 다음 세대인 우리 같은 중간 계층이 거의 없어요. 2000년대 중반 이후에 온 젊은 분들은 생계에 바쁘시죠.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일이 많아지는 것 같아요.”

이 중에서도 그녀가 가장 애정을 쏟는 행사는 베를린한반도평화통일음악회다. 단순한 공연이 아닌, 분단의 아픔을 음악으로 승화시키고 한반도 평화와 통일에 대한 염원을 독일 땅에서 울려 퍼뜨리는 장이기 때문이다.

“음악회는 저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어요. 베를린 자체가 분단과 통일을 경험한 도시잖아요. 이곳에서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노래한다는 것은 단순한 공연을 넘어서는 상징적 의미가 있죠. 독일 사람들도 우리의 분단 현실을 이해하게 되고, 재독 동포들에게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통일 의지를 다지는 시간이 되어요.”

최근에는 더욱 창의적인 방식으로 평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베를린 시내의 전쟁, 분단, 통일 그리고 평화의 상징이 되는 장소를 자전거를 타고 누비며 플래시몹을 하는 ‘한반도 평화염원 자전거투어 및 플래시몹’을 기획해 독일 현지에서 한반도 분단 현실과 함께 평화의 필요성을 알리는 활동을 벌이고 있다. 자전거라는 일상적 교통수단을 통해 한반도 문제를 자연스럽게 알리는 이런 아이디어는 그녀의 기획력과 실행력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자전거 캠페인은 독일 사람들이 일상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방식이에요. 베를린 곳곳을 다니며 한반도 평화 메시지를 전하는 거죠. 몸은 베를린에 있지만 마음은 항상 한반도와 함께하고 있어요.”

한반도평화음악회는 처음에 남북한 음악인들이 베를린에서 만나 함께 연주하는 무대로 기획되었다. 그러나 대북제재로 인해 독일에 와있던 북한유학생들까지도 모두 돌아간 상황이라 원래의 계획은 성사될 수 없었다. 그래서 독일 현지 프로 무대에서 활발히 활동중인 젊은 한인음악가들로 오케스트라를 구성해서 음악회를 진행하고 있다, 이러한 형태의 오케스트라는 해외에서 매우 드문 예로써, 한반도의 평화 메시지를 전하는 동시에 한국 클래식 음악의 수준을 널리 알리는 두 가지 성과를 동시에 거두고 있다. 해외 현지 음악회를 준비하며 만나는 다양한 세대의 한국인들, 그리고 한국에 관심을 가진 독일인들과의 소통은 그녀에게 큰 보람을 안겨준다. 특히 젊은 세대들이 통일 문제에 무관심해지는 현실 속에서, 음악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자연스럽게 한반도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는 모습을 볼 때 가장 뿌듯하다고 한다. 그녀는 이 오케스트라가 앞으로 ‘윤이상’의 이름을 딴 상징적인 음악 단체로 발전하길 바라며, 언젠가 남북한 연주자들이 한 무대에 올라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함께 노래하는 날이 오기를 꿈꾸고 있다.

베를린평화김치축제 역시 독일어로 된 한식요리책을 내기도 한 그녀가 공들이는 행사로, 단순한 음식 축제를 넘어 한반도 평화에 대한 메시지를 담아내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 계엄선포에 독일에서도 민주주의 수호 나서,

지난 12월 윤석열 대통령의 계엄 선포 당시, 정선경 동문은 슈투트가르트에서 딸을 만나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소식에 처음엔 “진짜로 일어날 수 있는 일인가?”하는 의심이 먼저 들었던 그녀는 곧바로 행동에 나섰다.

“12월 5일 베를린에서 제일 먼저 집회를 했어요. 저는 슈투트가르트에 있었지만 베를린과 연락하며 준비를 도왔죠. 그리고 12월 7일 프랑크푸르트 집회에는 딸과 함께 직접 참석했어요. 기차비만 30만원이 들었지만 꼭 가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녀는 베를린, 프랑크푸르트, 슈투트가르트에서 열린 집회에 직접 참여해, 때로는 성명서를 쓰고, 때로는 스피커를 설치하거나 유인물을 복사하고, 사진·영상 편집을 맡는 등 필요할 때마다 다양한 역할을 감당하며 민주주의 수호의 최전선에 있었다. ‘재독한인민주시민모임’의 이름으로 독일공영방송 푀닉스(Phoenix)의 우익 다큐 방영을 막기 위한 서명운동을 벌이거나, 독일 언론의 왜곡보도에 맞서 독일 내 여러 지역의 탄핵집회팀들과 연대해 대응했던 경험은 그녀에게 특별한 의미로 남아있다. 또한 처음 집회를 주최한 젊은이들에게 ‘임을 위한 행진곡’의 올바른 버전을 알려주는 등 경험을 나누고 조언을 건네는 모습에서는 세대를 아우르는 그녀의 리더십이 자연스럽게 드러났다.

“젊은 친구들이 음악회용 코러스가 들어간 느린 버전을 틀었더라고요. 집회 끝나고 원곡으로 부른 빠른 버전이 있다고 알려줬어요.”

이 과정에서 뜻밖의 외민동 인연도 있었다. 집회 준비 중 음원이 필요할 때 백자 동문으로부터 도움을 받았던 것이다.

“백자 동문이 좋은 음원을 보내주셨어요. 그때 외민동 네트워크의 소중함을 느끼고 해외에서도 우리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실감했어요.”

하지만 그녀가 가장 우려하는 것은 젊은 세대의 정치적 무관심이다. 여러 활동을 하면서 만난 젊은이들 중에서는 한반도가 여전히 분단상태이며 정전 중이라는 사실을 잊은 채, 현재 그저 평화롭다고 여기거나, ‘한반도평화’를 외치는 것조차 ‘정치적 중립’을 내세우며 참여를 꺼리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정치적 중립을 말하는 순간, 사실상 방관하는 셈이에요. 만약 절대적 중립을 지켜야 한다면 선택이 요구되는 투표에도 참여할 수 없지 않을까요? 민주주의는 참여를 통해서만 지켜질 수 있는데, 젊은 세대의 무관심이 걱정스러워요.”

87년을 경험한 세대로서 그녀는 민주주의가 결코 저절로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런 만큼 이런 경험과 의식이 다음 세대에게 어떻게 전달될 것인지가 그녀의 고민이기도 하다.

🌍🗳️✈️ 재외국민 참정권 확대 운동, “누구나 해외에 나가는 시대, 남의 일이 아니다”

정선경 동문이 가장 열정적으로 매달리고 있는 분야는 재외국민 참정권 확대 운동이다. 2020년 코로나19로 인해 독일 대사관이 일방적으로 총선 투표를 중단했을 때부터 시작된 이 운동은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다.

“대사관에서 내세운 이유들이 너무나 말이 안 됐어요. 선거를 해본 경험이 없는 사람이 쓴 글이라고 반박문을 냈죠. 독일 변호사에게도 문의해서 법적 검토까지 받았었어요.”

그녀는 재외선거법 개정을 위해 서명운동을 벌이고, 한국을 방문해서 국회의원들을 만나 문제점을 설명했다. 행정안전위원회 위원장이었던 서영교 의원, 국민의힘 김석기 의원 등을 만나 개정 법안의 필요성을 역설했지만 뚜렷한 성과는 없었다고 한다.

“현재 재외선거 규정은 국민의 기본 권리인 참정권을 우선하기 보다는 선거관리상 편의 중심으로, 결과적으로 국민의 선거권을 제한하고 있어요. 한국에서는 통합선거인명부로 어디서든 사전투표가 가능한데, 해외에서는 왜 따로 사전등록을 해야 하나요? 행정력 낭비이기도 하고요.”

그녀는 재외국민 투표율이 전체의 6-8%에 불과한 현실을 지적하며, 국외부재자는 국내부재자와 같이 통합선거인명부에 의한 사전투표와 거소투표(우편투표)를 할 수 있도록하는 법 개정과 의식 개선이 동시에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또한 재외국민 참정권 문제가 단순히 해외 거주자만의 문제가 아니라고 힘주어 말했다.

“지금은 누구나 해외에 나가잖아요. 재외선거 기간 중 해외에 있으면 현지에서 투표해야 하니까 국내 거주자들에게도 해당되는 문제예요.”

재외선거법 개정 촉구 서명운동을 직접 진행한 그녀는 서명참여명단에서 예전 학창시절의 낯익은 이름들을 본 것이 외민동에 가입한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외민동이 가진 인적 네트워크와 정치적 영향력을 활용한다면 재외국민 문제 해결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는 게 그녀의 생각이다. 특히 정치권과 연결고리가 있는 동문들이 이 문제에 관심을 가져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 멀리 있어도 마음은 곁에, 외민동과 함께 하고 있죠

30여 년간 해외에서 활동해온 경험을 바탕으로, 정선경 동문은 외대민주동문회에 대한 남다른 애정과 기대를 드러냈다. 

하지만 한편으론 외민동 활동을 지켜보면서 그녀가 느끼는 감정은 복잡하다. 해외에 거주하는 동문으로서 때로는 소외감을 느끼기도 한다는 솔직한 고백을 했다.

“외민동 활동을 보면 대부분 국내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어요. 당연한 일이겠지만, 해외에 있는 동문들은 소식만 듣는 경우가 많죠. 물리적 거리감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하지만, 가끔은 ‘우리도 함께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기 어려울 때가 있어요.”

특히 코로나19 이후 온라인 활동이 활발해졌지만, 시차 문제나 집중하고 있는 활동의 상이 등으로 인해 실시간 참여가 쉽지 않다는 현실적 어려움도 토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해외 거주 동문들이 한국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이 여전히 많다고 생각한다. 특히 정확한 해외 정책이나 사례를 분석 전달하는 역할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얼마 전에 어떤 전문가 분이 독일 국회의원은 보좌관 수는 3명이하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런데 독일 국회의원의 보좌관 수는 정해져 있지 않아요. 주어진 예산 안에서 자유롭게 조정할 수 있어요. 이런 정보는 현지 동포를 통해 확인해보면 더 정확할 텐데 싶어서 조금 아쉬웠어요.” 그녀는 또한, 해외 정책 등을 국내에 도입할 때 충분한 분석 없이 받아들이는 경우, 우리 현실에 맞지 않아 뒤늦게 문제가 드러나는 일이 발생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부분적인 사례를 전체로 오해해 일반화하는 오류 역시 종종 일어난다며, 현지에 있는 사람들의 정확한 정보 제공이 중요한 이유라고 강조했다.

이렇게 그녀는 해외 거주 동문들이 단순히 소식을 받아보는 수동적 존재가 아니라, 정확한 해외 정보와 경험을 한국에 전달하는 능동적 역할도 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 배낭 속 민주주의, 베를린에서 계속 걷습니다

일이 보이면 해야 하는 성격이야“라고 말하는 정선경 동문. 그녀의 일정표는 여전히 빼곡하다. 올여름, 한국에서 오페라 공연 감독을 맡게 된 딸과 함께 잠시 한국을 방문할 예정인 그녀는, 어디에 있든 여러 프로젝트와 행사 준비를 할 예정이다.

우선 사업예산 확보가 가장 시급한 문제다. 국내에는 중앙정부나 지방자치단체를 통한 지원 프로그램이 많지만 정작 해외거주하는 국민이나 동포들은 그 혜택과 지원에서 거의 소외되고 있는 것이 아픈 현실이다.

“한국 문화를 세계로 퍼뜨리는 데 있어, 재외동포야말로 살아 있는 연결 고리에요. 또 해외동포들이 한국 문화를 접하고 이어가는 일은 단지 향수의 문제가 아니라 정체성과 뿌리를 지키는 일인데, 한국문화원에서조차 외면당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아요.”

그렇다면 언젠가 고국으로 돌아갈 생각은 없을까? 이 질문에 그녀는 복잡한 심경을 털어놓았다. 연로하신 부모님들을 생각하면 귀국해야하지 않을까 싶지만, 30년을 독일에서 산 자신이 과연 한국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고 했다.

“물론 한국이 그리워요. 하지만 현실적으로 생각해보면, 이제 한국에 가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특히 한국을 방문할 때마다 느껴지는 치열한 경쟁사회의 분위기는 그녀에게 부담으로 다가온다. “한국 사람들이 상당히 전투적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여기서는 삶의 속도나 분위기가 더 여유롭거든요”라는 그녀의 말에서 오랜 독일 생활이 그녀에게 미친 영향을 엿볼 수 있다.

그녀는 베를린에서 평화와 통일을 위한 활동을 계속해나가려고 한다. 배낭을 메고 사는 듯한 외국인의 삶이지만, 그 배낭 속에는 민주주의와 평화, 그리고 조국에 대한 변함없는 사랑이 들어있다.

정선경 동문과의 인터뷰를 마치며, 그녀가 걸어온 길이 단순한 개인의 성공담이 아님을 깨달았다. 87년 민주화의 현장에서 시작된 그녀의 여정은 베를린 한복판에서 여전히 진행형이다. 그녀의 삶은 국경을 넘나드는 민주주의 정신의 살아있는 증거이기도 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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