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상전 동문(독일어과 61) 인터뷰

신상전 동문(독일어과 61) 인터뷰

"나는 풀 베고, 나무하고, 굶주리던
신상전이가 나이를 먹은 것일 뿐입니다"

경남 산골 빈농의 아들에서 대학 총장까지, 그리고 다시 거리로, 신상전 동문(독일어과 61)의 삶과 신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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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민

편집부장, 신방과 85학번

양주시 외곽, 산과 호수가 어우러진 아파트 단지. 2월의 찬 공기 속에서 신상전 선배(독일어과 61)와 사모님이 환한 얼굴로 문을 열어주셨다. 올해로 여든넷. 매주 서초동 촛불집회에 빠지지 않고 나가신다는 말을 이미 외민동 동문들 사이에서 여러 차례 들었다. 양주에서 전철을 타고 서울까지, 결코 가까운 거리가 아닌데도 말이다.

원래 성격이 그래요. 좋게 말하면 정의롭고, 나쁘게 말하면 너무 고집이 센 거지“라며 사모님이 먼저 웃으셨다. 세 시간 가까이 이어진 인터뷰 내내, 나는 한 인간이 얼마나 치열하게 시대와 부딪치며 살아올 수 있는지를 온몸으로 느꼈다.

소나무 껍질로 죽을 쑤던 시절

신상전 선배는 1942년 1월, 경남 양산 통도사 근처 깊은 산골에서 태어났다. 가장 가까운 큰 마을까지도 5킬로미터 산길을 걸어야 하는 곳이었다. 도로도, 전기도 없었다. 임진왜란 때부터 뿌리를 내린 종씨 마을, 동네 사람 모두가 친척이었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학교 문 앞에 가본 적이 없는 빈농이었다. 다만 외할아버지가 경남 일대에서 이름 있는 한학자였고, 그 영향을 받은 어머니는 글은 몰랐지만 꼿꼿하고 품위 있는 분이셨다고 했다.

“사람 됨됨이가 어떠해야 하는지는 아버지 어머니를 통해 많이 배웠어요.”

6·25가 터졌을 때 피난은 가지 않았지만, 전쟁의 공포는 산골까지 스며들었다. 통도사 뒷산 신불산 일대에 주둔한 북한군 잔류 병력이 밤마다 마을로 내려와 식량을 거둬갔다. 운동회에서 받은 공책마저 그렇게 사라졌다. 무엇보다 마을의 젊은이들이 거의 모두 군에 끌려갔고, 그 가운데 많은 이들이 돌아오지 못했다. 큰누나의 남편도, 어머니의 남동생도 입대 직후 전사 통지서만 남겼다.

“우리 어머니는 매일 우셨어요. 동네 아낙들이 만나면 그냥 울고, 한 사람이 울면 따라 울고. 늘 그런 슬픈 분위기였어요.”

흉년이 들면 쭉정이밖에 남지 않는 논에서, 가족은 소나무 안쪽 하얀 껍질을 벗겨 말려 빻아 죽을 쑤어 먹기도 했다. 학교에 들어가기 두 해 전부터 새벽같이 일어나 소를 먹이고, 방학이면 하루에 두 짐씩 나무를 했다.

“나에게 처음 주어진 장난감이 지게였어요. 어른 지게가 부러워서 나도 갖고 싶다고 했더니, 아버지가 톱으로 잘라 작게 만들어주셨죠.”

초등학교 3학년 때는 전쟁통에 부산으로 보낼 장작을 산에서 지게에 지고 내려왔다. 다리가 벌벌 떨리고, 어깨엔 피멍이 들었다. 그러나 한 번도 부모를 원망한 적은 없었다고 했다.

 “어머니, 저는 평생 돈 버는 일은 하지 않겠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부터 6학년까지 줄곧 반에서 1등, 늘 반장이었다. 그러나 중학교 진학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5학년 때 어머니 치마자락을 붙들고 “나 중학교 좀 보내줘”라고 졸랐다. 4·5·6학년을 가르쳐주신 담임선생님이 “어려워도 이 아이는 보내야 합니다”라고 어머니를 설득해주셨다. 중학교까지 산을 넘어 12킬로미터. 겨울이면 호롱불 아래 새벽밥을 먹고 캄캄한 산길을 걸었다. 돌아올 때도 어둠이었다. 보리밥 도시락 하나로 하루를 버텼다. 그래도 한 번도 불편하다고 느끼지 않았다. 학교 가는 것이 그저 즐거웠다.

중학교 졸업 무렵, 여자 음악 선생님 한 분이 그의 인생을 바꿔놓았다. 부산대 음대를 나온 분이었다. 성적 좋은 이 학생을 유심히 지켜보시더니 진로를 물었다. “집 형편이 안 돼서 제 마음대로 결정하기가 어렵습니다”라고 답하자,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그래도 공부는 해야 되지 않겠니. 일단 입학부터 해놓고 보자. 내가 도울 방법을 찾아보마.” 그 말을 믿고 부산고에 원서를 넣었다. 480명 모집에 96등으로 합격했다.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도시, 부산이었다.

고등학교 1학년, 피난민 천막촌의 흙벽집 방 하나를 빌려 자취를 시작했다. 겨울이면 흙벽이 얼어붙어 방 안보다 바깥 공기가 따뜻했다. 창문을 열어놓고 이불을 몸에 감은 채 공부했다. 부모님으로부터 한 달에 쌀 열 되를 받았는데, 그중 서너 되는 시장에 내다 팔아 용돈을 마련했다. 저녁은 국화빵 네다섯 개로 때웠다. 수돗물 대신 새벽 두세 시에 우물에서 두레박으로 바닥을 긁어 물을 퍼왔다.

그렇게 한 해를 버텼지만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부산에 아는 사람도 없던 그는, 초등학교 시절 담임이셨던 변만순 선생님이 부산에서 교사 생활을 하고 계시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갔다. 혹시 주변 학생 중에 입주 가정교사를 구하는 집이 있으면 소개해달라고 부탁드리기 위해서였다. 선생님은 사정을 들으시더니 당장 자신의 집 다락방을 내주셨고, 사모님은 매일 아침밥을 차려주셨다. 이후 음악 선생님의 소개로, 부산 거제동 철도원 관사촌의 한 가정에서 입주 가정교사를 하게 되었다. 그 집 주인 아저씨는 일제강점기의 유도 선수 출신으로, 불의를 참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미군이 한국인 접대원을 농락하는 것을 보고 혼자서 달려들어 2층에서 미군을 집어던졌다는 일화도 있었다.

“나에게 이상적인 남자의 표상이었어요. 과묵하지만 규칙을 지키고, 생활에 절도가 있고, 불의를 참지 않는.”

고등학교 시절, 『사상계』를 탐독하며 세상에 대한 목마름을 달랬다. 학교 공부보다 훨씬 많은 것을 그 잡지에서 배웠다고 했다. 정치, 경제, 사회, 사상, 남북문제. 어느 날 논에서 어머니와 모를 심다가, 어머니가 물었다.

“너는 커서 뭐가 되고 싶니?”

소년은 대답했다.

“어머니, 저는 앞으로 돈 버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겠습니다.”

놀란 어머니에게 더 이상의 설명은 하지 않았다. 면서기들이 권력을 휘두르며 아무 잘못 없는 아버지를 포승줄에 묶어 끌고 가는 모습, 자유당 정권의 부패와 탄압을 눈으로 보며 자란 소년의 결론이었다. 탄압 없고, 착취 없고, 자유로운 세상. 그것이 어린 시절부터 품은 꿈이었다.

 외대에서 해병대까지, 맨발의 무전여행

수학이 싫어 수학 시험이 없는 학교를 찾다가 한국외국어대학교 독일어과에 지원했다. 원래 독일 철학을 독일어 원서로 읽겠다는 것이 고등학교 시절부터의 꿈이었다. 당연히 합격했지만, 서울 생활은 녹록지 않았다.

“어떨 때는 이틀, 사흘 굶은 적도 있고, 학교 가서 수돗물 틀어놓고 맹물 마신 적도 있어요. 그렇지만 멀쩡한 놈이 어디 가서 밥 얻어먹기는 좀 그렇잖아요.”

1학년을 마치고 자원입대로 해병대에 들어갔다. 등록금을 마련할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해병대 들어가니까 훈련이 고되긴 해도 아무 걱정이 없는 거죠. 먹는 걱정이 없는 거야. 군대가 편하더라고요.”

운 좋게도 학보병 제도가 해병대에까지 적용되면서 1년 반 만에 제대할 수 있었다. 전화위복이었다. 이 인연으로 선배는 지금도 해병대 예비역연대 고문을 맡고 있다.

1964년 복학했지만 캠퍼스는 평온하지 않았다. 전국에서 한일회담 반대 투쟁이 거세졌고, 외대에서도 집회가 열렸다. 선배도 참여했다가 동대문 경찰서에 끌려가 유치장에 구금되었고, 서부지법에서 약식재판을 받고 풀려났다. 곧이어 정부가 계엄령을 선포하고 전국 모든 대학에 휴교령을 내렸다.

“군대 갔다 와서 겨우 복학했는데, 국가의 폭력을 처음으로 느꼈어요. 아주 무거워요. 총칼로 그냥 짓누르는 거예요.”

삶의 방향을 놓고 극심한 번민에 빠졌다. 나는 무엇을 위해, 어떤 원칙에 따라, 어떤 가치관으로 살아야 하는가. 견딜 수 없는 혼란이었다.

그래서 걸었다. 안양에서 출발해 천안, 논산, 익산을 거쳐 남원 광한루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지리산을 넘어 함양과 산청을 지나 고성까지. 꼬박 11일, 포장도 안 된 자갈길을 하루 40킬로미터씩 걸었다. 새벽부터 저녁까지 혼자 걷고, 민가나 역 대합실, 파출소 대기실 의자에서 잠을 청했다. 고성에서 초등학교 교사로 있는 중학교 친구를 찾아갔는데, 노독으로 열이 나 사흘을 쉬어야 했다. 다시 마산까지 걷고, 부산을 향해 출발한 날은 비가 억수로 쏟아졌다. 진영 근처까지 왔다가 결국 친구가 쥐어준 여비의 유혹에 버스를 타고 말았다. 자신을 극한까지 몰아붙이며 스스로에게 답을 구하는 여행이었다.

“몸은 매우 고단했지만, 반대로 정신은 맑아지고 많은 것이 정리되는 느낌이었습니다. 일종의 해방감을 느꼈습니다.”

1966년 졸업 후 대학원에 진학했다. 군대 제대 후부터 독일문화원 회화 클럽에서 여러 대학 학생들과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 독일어로 토론했고, 독일 수녀들을 찾아다니며 강습도 받았다. 대학원 재학 중이던 1968년에는 충북 단양 매포면의 한일시멘트 공장에서 독일인 기술자 20여 명의 통역사로 1년간 일하며 학비를 벌었다. 독일 차관으로 시멘트 공장을 건설하는 현장이었다.

“내 직업이 회사원이어야 한다, 그런 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거야. 나는 공부하고 싶었어요.”

회사 상무가 서울 본사로 자리를 옮겨주겠다, 회사에서 유학도 보내줄 수 있다며 붙잡았다. 누가 봐도 좋은 조건이었다. 그러나 논에서 어머니에게 했던 그 말은 소년의 객기가 아니었다.

“엮이면 안 되겠더라고요. 좋은 제안이었지만, 남의 돈에 빚을 지는 순간 내 길은 없어지니까요.”

석사 논문을 마무리하고, 독일 유학을 준비했다.

독일로 해방, 그리고 죽음의 문턱

1970년, 괴테 인스티튜트의 독일어 교사 재교육 프로그램에 선발되어 마침내 독일로 건너갔다. 처음부터 30개월만 하고 돌아올 생각은 없었다.

“독일에 가는 것이 하나의 탈출이기도 했고, 해방감을 느꼈어요. 고향이 그립다는 생각이 요만큼도 안 들었어요.”

박정희 독재 아래 숨 막히던 한국을 떠나, 68운동의 여운이 남아 있는 독일에서 학문의 자유와 사상의 자유를 처음으로 온몸으로 느꼈다.

뮌헨에서 간호사로 일하고 있던 사모님과의 만남도 이 무렵이었다. 독일의 한 신부님이 건네준 주소 한 장이 인연의 시작이었다. 당시 독일에서 한국 사람은 무척 귀했다. “호수 하나 사이에 살았으니까 자주 만났죠. 금세 둘 다 청춘이니까 연애로 들어갔어요.” 사모님의 말씀에 선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독일 도착 1년 만에, 성탄절 무렵 갑자기 쓰러졌다. 양쪽 폐가 모두 곪는 급성 폐렴이었다. 일반 병원에서 손을 놓고, 결핵 전문 요양원으로 이송되었다. 석 달 동안 정신이 오락가락했다. 의사가 사모님에게 말했다. “회생 가능성이 전혀 없습니다. 포기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그 말을 들은 신 선배는 포기할 수 없었다.

“그렇게 죽는 게 너무나 허무했어요. 받아들일 수 없었어요. 나는 죽는다는 생각을 요만큼도 안 했어요. 그래서 절대 포기하지 않겠다고 외쳤지요.”

사모님도 말씀하셨다.

“의사가 나갔는데 이 사람은 ‘절대 포기 안 해’라고 했어요. 그걸 알아요, 내가.”

요양원에서 만 1년을 보냈다. 처음 건물 밖으로 제 발로 걸어 나온 것은 4개월이 지나서였다. 소나무 아래 놓인 간이 침대에 누워 공기 요법을 받으며, 이역만리에서 하늘을 올려다보던 그 처량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고 했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따뜻한 인연이 있었다. 새벽에 눈을 떠보면 60대 수녀가 그의 손을 꼭 잡고 조용한 미소로 격려해주었다. “어머니 같았어요. 외국인이지만.”

한 무뚝뚝한 의사는 나치 시대에 유태인 약혼녀를 잃고, 수십 년 뒤에야 재회했지만 이미 서로 다른 삶을 살고 있었다는 사연을 들려주었다. 연금 수령 기간을 채우기 위해 늦은 나이에 다시 의사 생활을 시작한 사람이었다. “순수한 독일인이 있구나, 하고 생각했어요. 지금도 가끔 그 의사 생각을 합니다.”

수술 없이 1년 만에 퇴원했고, 이후 4~5년간 약물 치료를 거쳐 완치 판정을 받았다. 아직 요양원에 있던 가을, 뮌헨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보훔에서 배운 것들 학문, 민주주의, 연대

완쾌 후 보훔(Bochum) 대학에서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했다. 보훔 대학은 루르 공업지대 탄광 노동자 자녀들의 고등교육을 위해 설립된 독일 최초의 캠퍼스형 종합대학으로, 학풍이 진보적이었다. 68운동의 영향 아래 교수와 학생이 존댓말 대신 친구 사이에 쓰는 ‘두(du)’로 서로를 부르며 평등하게 토론하는 분위기였다. 학생이 교수에게 “당신의 그 주장은 틀렸다”고 거침없이 말하는 강의실이었다.

“한국에서 석사까지 마쳤다고는 하지만, 학문적 기초가 너무 부실했어요. 전부 새로 시작했습니다.”

독문학을 전공했지만 사실 관심은 독일 역사와 사회사상에 있었다. 독일 농민전쟁을 주제로 박사논문을 쓰다가 완성하지 못한 채 귀국했는데, “독일 농민전쟁은 우리 동학혁명과 많이 비슷해요”라고 했다.

한편 루르 지역에는 한국 광부와 간호사들이 집단으로 거주하고 있었다. 이들은 ‘한국 노동자 연합회(노련)’를 만들어 자신들의 권익을 지키고자 했다. 보훔 대학 유학생들과 노련은 자연스럽게 연대하여 토론회를 열었다. 한국 민주화를 열망하는 유학생들이 자발적으로 ‘한국 사회문제 연구회’를 결성했고, 35~36차례에 걸쳐 체계적인 토론을 진행했다.

1976년에는 교포 2세 자녀들의 한글 교육을 위해 보훔 한글학교를 설립했다. 선배가 초대 교장을 4년간 맡았다.

“상해 임시정부에서 교육에 힘을 쏟았듯이, 우리 공동체에도 살아 숨 쉬는 한국 혼이 필요했습니다.”

대사관 직속도, 교회 소속도 거부했다. 자유로운 공간이어야 한다는 원칙이었다. 운영위원회에서 모든 것을 회의로 결정하고, 연말 결산을 보고하는 방식으로 운영했다. 사단법인 등록을 위해 회칙을 독일어로 번역하고, 독일 민법에 맞춰 여섯 차례나 수정한 끝에 1977년 11월 14일, 정식 사단법인으로 등록되었다. 그 학교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으며, 최근 40주년 백서가 발간되었다.

“내 인생에서 최초로, 가장 본격적으로, 가장 완벽하게 민주주의를 시험해본 것이 보훔 한글학교입니다.”

 5·18, 최초의 기록

1979년 박정희가 사망했을 때, 독일 대사관이 조문 행사를 연다는 소식에 진보적 교포들이 들끓었다. 독재자가 죽었으면 그것으로 끝이지, 무슨 조문이냐. 나무 뒤에 숨어 있다가 약속된 시간에 일제히 대사관으로 쳐들어갔다. 대사와 참사관은 도망갔고, 정보부 요원 하나와 말단 서기관이 나왔다. 한국 민주화를 촉구하는 성명을 전달했다.

그리고 1980년 5월, 광주. 독일 방송은 광주의 참상을 실시간으로 보도했다. 탱크가 밀어붙이는 모습, 태극기로 덮인 관들이 끝없이 널려 있는 장면. 한국에서는 언론이 차단되어 국민이 알 수 없었던 것을, 독일의 유학생들은 생생히 지켜보았다.

“이건 기록해야 된다.” 한국 사회문제 연구회 멤버들은 첫날부터 매일 선배의 집에 모여 독일 신문, 방송, 일본 언론의 보도를 빠짐없이 기록했다. 사태가 끝난 뒤에도 후속 보도를 계속 모았다. 타자기도 시원치 않아 한 동료는 한자 타자기에 한글을 붙여가며 밤을 새워 작업했다. 광주항쟁이 끝난 지 한 달 만에 종합 보고서를 약 500부 인쇄하여 독일, 일본, 캐나다, 미국, 프랑스 등 각국 한인 사회와 외국 공관, 한국 각 대학 신문사에 배포했다.

2016년, 이 자료를 5·18 재단에 기증했을 때 재단 측의 반응은 놀라움 그 자체였다. 국내외를 통틀어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관한 최초의 보고서였던 것이다. 전남일보는 이 자료 기증에 관한 기사를 일주일간 연속 보도했다. 재단으로부터 감사패도 받았다. 독일에 있어 광주의 그 거리에 함께 서지는 못했지만, 세계를 향해 광주의 진실을 최초로 알린 사람들 가운데 선배가 있었다.

부서진 몸, 꺾이지 않는 싸움 덕성여대 14

1983년 귀국하여 덕성여대 교수가 되었다. 그러나 사학재단의 부패와 독선은 상상을 초월했다. 박홍국 이사장 체제 아래 비정상적 인사, 재정 사유화가 일상이었다. 선배는 교수협의회 부회장, 이후 회장을 맡아 덕성여대 민주화 투쟁의 선두에 섰다. 14년이었다. 450일간 천막 농성, 15일간 단식, 수업 거부, 시가행진. 몇 차례 이사회를 바꿨지만, 새로 오는 관선 이사장들마저 재단과 야합하는 일이 반복되었다.

싸움의 한가운데인 1990년, 몸이 먼저 경고를 보냈다. 왼쪽 귀가 점점 먹먹해지더니 청력이 떨어졌다. 검사 결과 왼쪽 귀 안쪽에 뇌종양이 자라고 있었다. 서울대병원 의사가 두 가지 선택지를 내놓았다. 두개골을 열고 뇌를 쪼개는 방법은 평생 두통과 기억 손상의 위험이 있고, 귀를 통해 들어가는 방법은 한쪽 청력을 완전히 포기해야 한다. 선배는 두 번째를 택했다. 당시 한국에서 귀를 통한 뇌종양 수술을 받은 환자가 열 명이 채 되지 않던 시절이었다. 17시간에 걸친 수술이었다. 귀 안의 신경을 뜯어내고, 뼈를 깎아내고, 귀를 한쪽으로 젖힌 뒤 종양을 떼어냈다. 수술 뒤 사흘간의 통증은 평생 경험한 적 없는 것이었다고 했다.

한쪽 전정신경이 사라져 몸의 균형을 잡을 수 없었고, 얼굴은 한쪽으로 돌아가 입과 눈이 비뚤어졌다. 1년간 학교에 나갈 수 없었다. 그러나 퇴원 2주 뒤부터 지팡이를 짚고 걷는 연습을 시작했다. 도봉산, 수락산 산길에서 넘어지고 또 넘어지면서, 하나 남은 전정신경만으로 서는 법을 몸에 익혔다. 독일에서 폐가 곪아 죽음 앞에 섰을 때도 “절대 포기 안 해”라고 했던 사람이다. 뇌수술 뒤에도 달라진 것은 없었다. 오랜 회복기를 거쳐 강단에 복귀했고, 다시 재단과의 싸움 한가운데로 돌아갔다. 몸은 예전 같지 않았지만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14년 투쟁의 후반전은 그렇게, 반쪽짜리 청력과 비뚤어진 얼굴을 안고 계속되었다.

결정적 전환은 김대중 정부 시절에 왔다. 박홍국 이사장의 비서였던 인물이 넘겨준 문서에는, 이사장이 김대중 대통령 부인의 제2부속실과 장남에게 거액을 전달한 기록이 담겨 있었다. 이 문건을 함세웅 신부를 통해 김대중 대통령에게 직접 전달한 것이 국면을 바꿨다.

“싸움을 할 때 여러 사람을 다 때리려 하면 안 됩니다. 제일 센 놈을 쳐야 합니다. 제일 센 놈이 누구냐? 대통령입니다.”

교수협의회 여성 동료들이 “선생님, 우리 다 죽이려고 그러냐”고 했지만, 선배는 물러서지 않았다. 결국 관선 이사가 파견되고, 학내 민주화 선거관리위원회가 구성되어 교수·학생·직원·동문이 모두 참여하는 절차를 거쳐 선배가 민선 총장으로 선출되었다.

 총장으로서의 개혁, 그리고 외로운 싸움

총장이 된 뒤에도 싸움은 계속되었다. 교수와 직원의 급여를 전국 최고 수준으로 올렸다. 교수·직원 자녀 2명까지 대학 등록금을 학교가 부담하는 파격적인 복지를 도입했다. 장학금을 대폭 확대하여 재학생 3명 중 1명이 장학생이 되도록 했다.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프로그램을 자발적으로 만들었다. 전산 통합 시스템(ERP)을 서울 시내 최초, 전국 두 번째로 도입했고, 통합 강의동과 체육관 신축을 추진했다.

그러나 개혁은 늘 저항에 부딪혔다. 시대에 뒤처진 학과를 개편하려 하면 교수들이 반대했다. 노동조합은 인사권 전면 이양을 요구하며 입시 업무를 거부했다. 석 달간 업무에 복귀하지 않은 노조에 대해 급여 미지급을 단행하고, 복귀 후에는 공개 사과를 요구했다. 그러나 단 한 사람도 처벌하지 않았다.

“총장 취임 후 제일 먼저 회식한 상대가 청소부 아주머니들이었고, 퇴임할 때 마지막 회식도 청소부 아주머니들과 했어요.”

선배는 담담하게 말했다.

“교수 사회가 한국에서 제일 보수적인 곳이에요. 민주화를 외치면서도, 정작 자기 학과 정원 한 명 줄이는 것에는 농성을 합니다. 학생들이 어려운 등록금을 내고 오는데, 시대에 뒤떨어진 교육을 4년간 제공하면서 부끄러워할 줄 모릅니다.”

2006년, 너무나 지친 몸으로 총장직을 내려놓았다.

거리에서 다시 만난 민주주의

퇴임 후 서울을 떠나 양주로 왔다. 독일에서 오래 살았기에 복잡한 도시가 싫었고, 딸들이 서울에 사니 너무 먼 곳은 안 된다는 사모님의 의견을 따랐다. 약 10년간 녹색당 활동을 하며 환경운동에 매진했다.

그리고 촛불이 켜졌다. 박근혜 탄핵, 최상병 특검, 윤석열 탄핵…. 거리에 서야 할 순간마다 선배는 양주에서 전철을 타고 서울로 향했다. 해병대 예비역연대 고문도 맡았다. 가입 회원 중 두 번째로 나이가 많은 최고참이다.

외민동에 가입한 것은 오랜 인연의 결실이었다. 덕성여대 시절 10여 년간 강의를 해준 신홍민(독일어과 75) 동문을 통해 외민동 이야기를 자주 들었다.

“내가 다닐 때 외대는 솔직히 좀 경박하다는 느낌이었어요. 생활 수단으로서 언어를 배우는 기관이라는 인상이었죠. 그런데 우리 후배들이 7~80년대를 거치며 투쟁의 앞장에 서고, 감옥에 가고, 지금도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선배로서 부끄럽고, 또 자랑스럽습니다.”

 “서민이 움직여야 세상이 바뀝니다

인터뷰를 마무리하며 선배에게 물었다. 이 나이에, 이 힘든 몸으로, 왜 계속 거리에 나오시냐고. 선배의 대답은 간결했다.

“독일에서 배운 것, 한국에 나와서 배운 것 — 세상은 한 사람의 영웅으로 바뀌지 않습니다. 아무리 뛰어난 사상가가 나와도, 한 사람의 힘으로는 움직이지 않아요. 좋은 생각이 다수에게 전해지고, 서민이 움직이고, 서민이 투쟁적으로 움직여야 조금씩 발전합니다. 나도 그 많은 서민 중 한 사람으로서 내 역할을 조금씩 하고 싶을 뿐입니다.”

그리고 한마디를 더 보탰다.

“나는 경남 산골에서 풀 베고, 소 먹이고, 나무하고, 굶주리던 신상전이가 나이를 먹은 것일 뿐이에요. 독일에서 공부하고, 대학 교수를 하고, 총장을 했던 신상전이가 아닙니다.”

인터뷰를 마칠 무렵, 이런 생각이 들었다. 지게를 장난감 삼아 놀던 아이, 소나무 껍질 죽으로 배를 채우던 아이, 창문을 열어놓고 이불을 뒤집어쓰며 공부하던 소년이 여든넷의 오늘까지 단 한 번도 자기 자신을 위해 포기하거나 타협한 적이 없구나. 이 한 사람의 삶 앞에서, 인터뷰를 하러 온 내가 오히려 무언가를 받아 가는 기분이었다. 감히 ‘존경’이라는 말을 쓸 수 있다면, 이 글을 읽는 동문 여러분도 같은 마음이시리라 믿는다.

함께 가자, 외민동. 선배가 걸어온 길이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세상은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의 것이라고.

*동영상 촬영·제작 차재훈 동문(포어 94)

9 Responses to “신상전 동문(독일어과 61) 인터뷰

  • 산골 가난한 소년이 나이를 먹은 것일 뿐 지식인이 아니라는 말씀에서 겸손함이 느껴지고,
    한 사람의 영웅보다 서민 대중의 투쟁이 더 중요하다는 말씀도 그 연장선상에 있는 것 같네요.
    단, 역사를 돌아보면 리더(개인과 조직)의 역할도 절대 간과해선 안 된다고 봅니다만.
    학보병(학적보유병) 제도가 뭐지? 하고 찾아봤는데, 비판적 설명은 필요할 듯.

  • 참 귀한 인터뷰 내용입니다.
    퍼갑니다.
    지금 123에 대한 연작 작품을 만드는데 활용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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