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어과 85학번
일시 : 2025년 6월 8일(일)
장소 : 경기도 파주시 문산읍 사목로 223 일대
참석자 : 회원 + 가족 20여명
항상 글을 쓰며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60평생을 살아 왔지만, 막상 글을 쓰지 않는 스스로의 게으름을 생활전선이 우선이라는 핑계로 변명하던 내게, 뭔가 절대적인 시간이 주어졌고, 주어진 틀 안에서 글을 써야 한다는 강요 아닌 강요를 받고는 내심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나 보다. 게다가 미루고 미루다가 편집위원인 정석원 후배님의 전화까지 받고 나니 부담감이 백배다. 더 이상 미룰 수는 없을 것 같아 몇 자 적어 본다. 제 얘기가 정말 재미가 없더라도 선, 후배님들 부디 용서하시길….
몇 번 사석에서 말씀 드린 기억이 있어 반복되는 넋두리 같아 싫지만, 시농제 참석 경위와 느낌을 전달하려면 외민동 가입 이전부터 얘기를 풀어가야 할 듯하다.
1989년도에 졸업을 하고, 직장을 다니고, 결혼을 하고, 애들이 생기고, 그 애들이 커가고…
나도 남들과 다름없는 평범하다 못해 너무너무 평범한, 소시민의 삶을 살고 있었다. 그때 까지는.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
그 때 희생된 학생들과 또래인 딸 둘(당시 20살, 15살)을 둔 아빠로서, 자식을 잃고 망연자실한 그 부모들의 마음이 너무나 아프게 느껴져서 견딜 수 없어 다시 서게 된 광장이었다. 그 가슴이 무너져 내린 부모님들과 경복궁 담벼락을 의지하며, 경찰과 대치하던 시간들…. 난 지금도 외출할 때 마다 부적처럼 노오란 세월호 팔찌를 차고 나간다. ‘잊지 않겠다’는 다짐을 잊지 않기 위해.
[2016년 세월호 2주기 2일 전]
혼자 사시던 어머님의 교통사고 소식. 정신없이 병원으로 달려가던 날. 덤프트럭이 횡단보도를 건너시던 어머님을 치어 다리가 절단되신 황망한 사고. 그 사고 후 4년 동안 이 병원 저 병원을 전전하며, 어머님 케어와 보험사와의 싸움으로 지낸 세월들…. 그 때도 토요일엔 박근혜 탄핵집회엘 나갔었다. 끈질기게. 2021년 10월에 어머님 천국 가시고, 난 다시 집으로 들어왔다.
[2024년 12월 3일 계엄령]
그 날 난 잠자리에 막 들려는 순간이었다.
“아빠, 게엄령 내렸대~” 큰 아이가 방문을 벌컥 열어젖히며 외쳤다. 난 “너 또 검증되지 않은 유투브 본 거 아니냐”며 거실로 나섰다.
친구가 톡으로 알려줬다며, 큰 딸이 거실 TV를 켜는 순간, 난 나도 모르게 꼴 보기 싫은 윤석열을 향해 무지막지하게 욕을 해대고 있었다. 나중에 가족들이 “욕을 그렇게 잘 하는 사람인지 몰랐다”고 하더라만….
큰 딸애는 “아빠, 우리 국회로 가야 되는 거 아냐?”라며, 옷을 주섬주섬 입기에 나도 덩달아 옷을 입고 있는데 집사람이 만류했다. 내일이면 계엄이 해제될 거라는 예언까지 하며 만류했다. 정작 만류한 본인은 코를 골며 자고, 나와 딸들은 뉴스와 유튜브를 넘나들며 밤을 새웠다.
그 날 이후, 재택근무를 하는 나로선 최대한 업무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하며, 평일 저녁과 주말에 열리는 집회에 나갔다. 이 땅의 민주주의가 훼손되지 않도록 내가 믿는 신께 빌고 또 빌었다. 내 딸들에게 온전한 민주 세상을 넘겨주고 싶었다.
[2025년 3월 29일 외민동과의 우연한 만남]
그 날도 집회에 참석했다가 우연히 발견한 하늘색의 <한국외국어대 민주동문회> 깃발. 그 동안 집회에 나오면, 주변에 가족이나 친구들과 함께 참석한 사람들을 보며 외로움이란 감정이 스멀스멀 올라오던 중이었다. 갑자기 발견한 그 깃발. ‘왜 그 동안에는 안보였을까?’ 반가웠다….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난 거기에 모여 있는 분들이 후배들일 것이라 생각했었다. 대견하다고 생각했다. 응원해주고 싶었다. 가까이 다가갔는데, 고등학교 후배이자 외대 동문인 민신이의 얼굴이 클로즈업 되어 보였다. 반가웠다. ‘아~, 쟤도 응원해주러 왔나 보다’ 생각했더랬다. 아뿔싸~, 그 곳엔 후배들 보다는 선배들이 더 많았다.
난 그날 <외민동>에 가입을 당했다. ㅎㅎ
그동안 어떠한 모임에도 나가지 않고 살고 있었다. 고등학교 동문모임, 대학교 동문모임 등. 젊은 시절엔 몇 번 얼굴을 디밀었지만, 나이가 들수록 번거롭기만 하고 귀찮아졌다. 자주 울려대는 카톡 알림도 싫었었다. 민신이의 강권으로 가입은 했지만, 아직 낯설기도 했고 얼굴과 이름이 일치되지 않아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는데도, 난 버릇처럼 집회 후 뒷풀이엔 꼬박꼬박 참석했다. 처음 뵙는 선, 후배들이지만, 오랜 기간 만나온 친구들처럼 정이 가고 마음이 편했다.
[2025년 4월 4일 11시 22분 헌법재판소 윤석열 파면 선고]
그 날, 그 시간에도 난 광장에 앉아 있었다.
얼마나 마음 졸이며 기다리던 순간이었던가…. 같이하던 동료, 선배, 후배들과 얼싸안고 춤을 추었다. 그 날 쨍하고 비추던 봄 햇살이 한여름 뜨거운 태양의 열기처럼 느껴졌었다. 파면이 종결이 아닌 내란 척결의 시작임을 알고는 있었지만, 그 날 만큼은 기쁨을 만끽하고 싶었다.
[2025년 4월 6일 파주 외민동 시농제 참가]
파면 다음 날은 비가 내렸다. 집회 참가 문자가 왔으나 내일 시농제에 참석하려면, 오늘 앞당겨서 장모님을 뵈러 마눌님을 모시고 요양병원에 다녀와야 했다. 같은 학번 선민이의 재촉으로 얼결에 시농제 참가의사를 밝혔지만, 내심은 갈등하고 있었다. 아직도 선후배 구별이 난감하고, 서울 촌놈이라 할 줄 아는 게 없다는 게 이유였다.
하지만 어쩌랴~, 민신이네 가족들이 모두 간다기에, 애들이 힘들어 할까봐 내 차로 같이 가자 약속을 이미 했으니 무를 수 도 없는 걸…
토요일 톡방에 수진이가 비로 인해 땅이 질거라고, 장화 챙겨 오라 신신 당부를 했었다. 서울 촌놈이 장화가 있을 리 만무하다. 기껏 해 본 농사라는 게 집 베란다에 고추종자 두세 뿌리 화분에 심어서 여름 한 철 따먹은 게 전부인 놈인데.
둘째 딸래미의 선물 받은 패션장화를 몰래 꺼내 들고 들킬세라 서둘러 집을 나왔다. 장화를 갖고 간 걸 알면, 불벼락이 칠 터인데, 에라 모르겠다~ 장비발이라도 내세워야지. 집에 있던 조그만 호미도 하나 챙겼다. 별 쓸 데가 없었지만.
파주 시농제를 위해 모이는 집합장소는 고등학교 후배이자, 외대 동문인 설현이네 집이었다. 가는 내내 뒷자석에서 재잘재잘대는 민신이 딸래미들의 목소리가 왠지 낯설지 않았다. 우리 딸들 어렸을 때도 그랬었다. 이제는 성인이 되어 나보다도 키들이 더 크니, 언제 그리 빨리 컸을까 생각이 들 때가 많다. 내 기억 속의 딸들은 어릴 때 모습 그대로 남아 있는데…. 지난 20여 년이 후딱 지나가버린 것 같아 아쉽다는 생각을 요즘 들어 자주 하게 된다. 하여튼 날씨도 상쾌하고, 강변 바람도 너무 좋다.
도착하니, 선, 후배님들이 이미 많이 와 계신다. 처음 와 보는 설현이네 집, 정겹다. 뒷마당엔 동네 잔칫집 마냥 선후배가 모여 앉아 전을 부치고, 산나물 비빔밥을 준비하고, 불어과 선배님은 장작에 불을 붙여 수육할 고기를 삶고 계셨다.
외민동 깃발을 앞세우고 도착한 외민동 시농제 장소, 생각 보다 밭이 꽤 넓다. 준비해 간 푯말을 세우고, 제를 올리고, 감자를 조금 심었다. 장화를 신었다는 이유로 서울 촌놈도 난생 처음으로 땅에 씨앗이란 걸 심어 봤다. 다음에 한 번 더 와봐야겠단 생각을 했다.
선후배님들이 땀 흘려 정성껏 마련한 점심은 진수성찬 그 자체였다. 향긋한 봄의 산나물 비빔밥과 먹음직한 수육, 맛있는 김치와 전. 막걸리 한 사발 거나하게 들이키고 싶었으나 돌아가는 길 민신이 가족의 안전을 위해 참아야 했다.
백두산 백산수와 제주 삼라수로 동동주를 만드는 뜻 깊은 행사도 있었다. 그 때 만든 동동주는 이미 누군가의 뱃속에서 피가 되어 사라졌겠지만, 다음엔 그 동동주 맛을 꼭 보고 싶다.
그때 같은 자리에 앉아 얘기를 나눈 변호사 하신다던 후배님들(성함이 기억나지 않아 송구합니다~)과 막걸리 한 잔 같이 못 하고 온 게 무척 아쉬웠다고 전하고 싶다.
5월에 있을 광주, 정읍 행사가 기다려진다.
댓글 연습 삼아 올려봅니다.
서어85 민신, 일어86 설현이 형주 고교 후배라니, 몰랐네.
외민동 회원은 아니지만, 포어84 박종국, 서어84 최영순이 내 고교 동기라네.
안 궁금하다고? 응, 미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