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6에서 어느덧 686, 설마 786까지?
— 실종되어 버린 사회 대개혁
김종찬
회장, 정치외교학과 80학번
지난 7월 18일 200차 촛불집회 연단에 올라 했던 연설에서도 지적했듯이, 지금의 정부 여당은 내란 수괴 윤석열의 자폭으로 시작된 탄핵 국면에서 연인원 1000만 명의 민주개혁 진보 시민들이 ‘빛의 혁명’으로 만들어 준 정권입니다. 그러므로 이재명 정권은 광장과 거리에서 분출된 사회 대개혁을 완수해야 할 역사적 책무를 지고 있습니다.
집권 1년이 지난 지금, 개혁의 골든타임은 길어야 2년도 채 남지 않았습니다. 다시 오지 않을 이 귀중한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되는데도, 이 정부 여당은 촛불 1기 정부였던 문재인 정권의 전철을 그대로 밟고 있는 것은 아닌지 불길한 예감이 듭니다. 광장의 민주주의가 여의도 국회로 들어가기만 하면 실종되는 악순환이 이번에도 여지없이 되풀이되고 있습니다. 진작 매듭지었어야 할 검찰개혁이 마치 개혁의 전부인 양 블랙홀처럼 모든 이슈를 빨아들이는 사이, 나머지 개혁 과제들은 완전히 자취를 감추고 말았습니다.
386 정치인들의 퇴행적 모습
― 변화의 주역에서 기득권 수호의 주역으로
얼마 전에 끝난 민주당 지도부 선출 과정을 지켜보면서 우리는 실망을 넘어 참담함과 분노를 느낄 수밖에 없었습니다. 주어진 사회 대개혁 과제를 누가 더 유능하게 해결할 것인가를 겨루는 경쟁이 아니라, 자기가 누구의 적자(嫡子)이니 아니니 하는 논쟁으로 시작해 서로의 약점을 공격하고 헐뜯는, 구태 정치의 민낯을 그대로 드러낸 과정이었습니다. 동지의 언어와 통합의 언어 대신 저주의 언어, 분열의 언어가 난무했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당 대표 후보로 나선 세 사람 모두 이른바 대표적인 386 정치인이었습니다.
이들이 정치권에 처음 들어섰을 때, 우리는 이들이 세대교체를 통해 낡은 정치를 청산하는 변화의 주역이 되리라는 기대를 품었습니다. 그러나 이번 지도부 선출 과정에서 보여준 행태는, 이들이 공천권을 둘러싸고 격렬하게 벌어졌던 과거 계파 정치의 나쁜 유산을 고스란히 물려받았음을 여실히 보여주었습니다. 이들이 이렇게까지 공천권에 매달리는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대의민주주의 아래에서 국회의원은 주권자인 국민을 대표해 입법 활동을 하는 봉사자여야 하는데, 우리나라에서 국회의원은 온갖 특혜를 누리는 최고의 직업이 되었고 국회는 최고의 직장이 된 지 오래입니다. 이 자리를 얻기 위해, 또 계속 지키기 위해 공천권을 쥔 권력자 주위로 사람이 몰리고, 그 결과 계파 정치와 파벌 정치가 되풀이되는 것입니다.
한국 정치의 적폐 중의 적폐
― 적대적 공생 관계의 양당 독점 체제
이 악순환의 밑바닥에는 해방 이후 이승만 정권과 함께 시작되어 수십 년간 굳어진 양당 독점 체제가 있습니다. 그사이 박정희 유신독재와 군부 독재정권이 있었지만, 당명만 바뀌었을 뿐 두 개의 당이 정권을 주고받으며 집권해 왔습니다. 지역주의를 기반으로 확고히 자리 잡은 양당제는 두 당의 기득권을 안정적으로 재생산하는 구조적 장치가 되어, 세대교체를 통한 정치 개혁을 원천적으로 가로막는 걸림돌로 기능해 왔습니다.
미래 비전을 놓고 정책으로 겨루기보다 상대 당의 실책을 공격해 반사이익을 얻는 편이 훨씬 손쉬웠기 때문에, 두 당은 정권을 차지하려고 격렬하게 싸우면서도 결국 서로의 존재를 필요로 해 왔습니다. 문제는 386 정치인들이 정치권의 주류로 자리 잡은 뒤에도 이 권력 재생산 구조를 바꾸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양당제에 편승해 기득권을 지켰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습니다.
양당제 철폐의 유일한 방안
― 현행 선거제도 개혁
양당 독점 체제가 구조적으로 유지되고 굳어지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하는 것이 현행 선거제도입니다. 특히 한 지역구에서 단 1표라도 더 얻으면 모든 것을 가져가는 승자독식의 소선거구제야말로 양당 독점을 떠받치는 뿌리입니다. 두 거대 정당에 절대적으로 유리한 이 제도는 선거 때마다 주권자인 국민에게 사표(死票) 방지를 이유로 최선이 아닌 차악을 선택하도록 강요해 왔고, 그 과정에서 시민들의 정치적 무관심을 키워 왔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지금의 선거제를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됩니다. 소선거구제를 폐기하고 중대선거구제(한 지역구에 정당별 후보를 1명으로 제한)를 도입하는 한편,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를 과감히 확대해야 합니다. 중대선거구제는 선거구를 광역화해 지역주의를 넘어서는 방안이 될 수 있고, 비례대표제 확대는 다양한 가치를 지향하는 젊은 세대의 정치 세력이 제도권 정치로 들어올 수 있는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
선거제 개혁은 오래된 숙원 과제입니다. 2005년 고 노무현 대통령이 한나라당에 제안했던 대연정도 결국 실패로 끝나기는 했지만, 한국 정치의 고질병인 지역주의를 타파하기 위해 선거제를 바꾸려던 시도였습니다. 거듭 낙선을 감수하면서까지 고향 부산 출마를 고집해 ‘바보 노무현’이라 불렸던 그는 훗날 회고록 《운명이다》에서, 대통령 권력을 한 번 잡는 것보다 선거구제를 바꾸는 편이 훨씬 큰 정치 발전을 가져온다고 토로했습니다. 선거법 개정은 지금도 한국 정치의 가장 중차대한 과제입니다.
386 정치인들의 마지막 미션
― 선거법 개정으로 새로운 정치 지형 만들기
앞서 말했듯 이제는 686 정치인이 되어버린 386 정치인들이 지난 20여 년 동안 우리 정치의 발전을 위해 무슨 역할을 했는지, 유감스럽게도 기억에 남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게다가 이들은 이미 기득권 세력의 중심에 서 있습니다. 그렇다고 시민사회가 이들을 적대시하거나 외면할 수는 없습니다. 이들은 한때 민주화운동의 동지였습니다. 오늘의 그들이 있기까지 이 땅의 민주주의를 세우고 지키려 했던 수많은 민주 열사의 희생과 민주 시민의 피와 땀이 있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야 합니다. 촛불혁명과 빛의 혁명 과정에서 분출된 사회 대개혁 과제를 이들이 외면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만약 이번에도 이 정권이 실패한다면 우리 사회 전반에 실망과 좌절, 냉소와 패배주의가 만연할 것이고, 그 역사적 책임은 오롯이 386 정치인들에게 돌아간다는 사실 또한 분명히 각인시켜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들에게, 현역 정치인으로서 수행해야 할 마지막 미션을 요구해야 합니다. 여러 사회적 과제 가운데 당장이라도 착수할 수 있는 정치개혁의 첫걸음, 곧 선거법 개정입니다. 선거법은 헌법 개정을 거치지 않고 법률 개정만으로도 바꿀 수 있으므로 민주당 단독으로도 처리할 수 있는 일입니다. 이 일은 이들이 때만 되면 소환해 온 노무현 대통령의 유지를 받드는 길이기도 하고, 새로운 정치 지형을 만들어 젊은 세대가 제도권 정치로 들어올 수 있게 하는 세대교체의 발판이기도 합니다. 결코 쉽지 않은 미션이겠지만, 이것을 해내야만 386 정치인들이 686 정치인으로서 명예롭게 퇴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부디 이들이 이 역사적 책무를 거부하고 현실에 안주한 채 불명예스러운 786 정치인으로 남지 않기를…
이것이 또 하나의 희망고문으로 끝나지 않기만을…
※ 편집자 주 — 선거구제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한 설명. 현행 국회의원 300석은 지역구 254석(소선거구제) + 비례대표 46석으로 구성됩니다.
소선거구제 — 한 선거구에서 1명, 1표라도 더 얻으면 당선.
· 좋은 점: 선거 비용이 적고 유권자가 후보를 알기 쉽다.
· 아쉬운 점: 낙선 후보를 찍은 표가 모두 사표가 되고, 소수정당에 불리하다.
중대선거구제 — 한 선거구에서 2~4명을 선출. 소선거구제와 대선거구제의 절충안.
· 좋은 점: 사표가 줄고 선택의 폭이 넓어진다.
· 아쉬운 점: 당선자의 책임 의식이 옅어지고, 군소 정당 난립 우려가 있다.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 — 후보가 아니라 정당에 투표해 득표율대로 의석을 나눈다.
· 병립형은 비례 46석만 득표율대로 쪼갠다. 10%를 얻은 당은 약 5석.
· 연동형은 득표율만큼을 전체 몫으로 본다. 10%면 300석의 10%인 30석이 몫이고, 지역구에서 10석을 얻었다면 모자란 20석을 비례로 채워 준다.
· 거대 정당은 병립형이, 군소 정당은 연동형이 유리하다. 우리나라는 중간 형태인 준연동형을 쓰는데 취지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지적이 있다.
출처: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선거정보, 국회입법조사처 「현행 준연동형 비례대표제에 대한 오해와 이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