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랍어과 95학번
일시 : 2025년 6월 8일(일)
장소 :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월산리 593
참석자 : 회원 + 가족 20여명
모란공원은 50 평생 이번까지 포함해 4번 가본 것 같다.
물론 더 왔을지도 모르지만, 기억하는 한 나는 윤정이 때문에 모란공원에 왔다.
나에게 모란공원은 윤정이다.
대학교 4학년 2학기 때쯤이었을 거다.
당시 언론협의회 의장이었던 내게 전대기련(전국대학신문기자연합)과 학교에서는 1년 더 결의를 내서 학교에 남아주기를 바랬다.
고민을 많이 했다.
청년다운 정의로운 삶…. 그러나 가시밭길….
정말 많이 봤다. 거처도 없이 이 학교 저 학교 다니면서 한뎃잠을 자는 선배들….
1학년부터 4학년까지 우리가 집회를 가면 본의 아니게 1박2일 투쟁이 되곤 했다.
전경들이 우리를 에워싸는 일이 계속 일어났으니까.
그럴 때면 우리는 박스 한 장 깔고 신문지를 덮고 자거나, 그마저 없으면 의자에 몸을 말고 자야 했다.
그런 생활을 간혹 가다도 아니고 1년 내내 해야 한다고?
이기적인 나는 끝내 결의를 내지 못했다.
한뎃잠을 자는 고행의 삶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그렇게 나는 학교를 떠났고.
한 학번 후배인 윤정이는, 동기들과 함께 학교를 오래도록 지키고 있었다.
열정으로 살았던 이름
학교를 떠나 먹고 살기에 바빴던 나는 가끔 윤정이의 소식을 들었다.
학보사를 끝내고 언협장을 맡았다더라, 총학생회 선거에 출마했다더라, 한총련에, 민주노총에 갔다더라….
우리 윤정이 참 열심히 사는구나….
난 끝내 결의하지 못한 삶을 살아내는 너는 자랑스럽고 존경스런 후배구나….
그리고 얼마 후 윤정이가 중환자실에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민주노총에서 매일 쉬지 않고 선전물을 만들다가 쓰러졌다고 했다.
그게 마지막일 줄은 몰랐지
중환자실에 있는 윤정이는 매우 낯선 모습이었다.
금세 예쁜 윤정이로 돌아올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마지막이었다.
졸업식 때 학보사에서 같이 찍은 사진 속 윤정이의 그 모습을, 끝내 보지 못했다.
아마도 그때 처음 모란공원에 갔던 것 같다. 윤정이를 보내러.
20살의 윤정이와 21살의 내가 처음 만났는데,
31살로 멈춘 윤정이를 그곳에서 보냈다.
그러고 채 1년이 안 됐을 때였던 것 같다.
학보사 선후배들과 누군가의 차를 얻어 타고 윤정이의 묘지를 찾아갔었다.
시험기간, 너의 자취방에서 <오르페우스의 창>을 보며 ‘남주가 너무 멋지다!’를 연발하던 너와 나.
학교 앞에서 빵을 잔뜩 먹고, 너무 느끼하다며 떡볶이를 먹으러 갔던 너와 나.
원고 마감을 못하고 자던 너를 깨워주던 나.
늦잠 자서 아침조례 시간에 늦던 너를 혼내던 나.
집회에서 같이 도망가며 잡은 손을 꼭 쥐던 너와 나.
사진 찍을 때면 늘 볼을 빵빵하게 만들던 너, 박윤정.
연한 주근깨가 박힌 채 해맑게 웃는 윤정이의 사진에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그랬는데…
그랬는데…
나는 이기적이게도 윤정이를 잊고 살았다. 작년 11월까지.
잊고 살았다, 너무 오래
97학번 후배가 갑자기 연락을 했다. 윤정이형 추모제를 하는데 가지 않겠냐고.
너무 미안했다.
윤정이가 어떻게 갔는지 아는데, 어떻게 나는 그런 후배를 잊을 수가 있나….
자책을 하며 누가 여는 추모제인지도 모른 채 모란공원으로 갔다.
슬픔은 다만 굉장한 데서 오는 것이 아니다.
31살의 윤정이가 49살의 나를 보고 웃는다.
나는 운다.
그동안 살피지 못해서, 생각조차 안 해서, 나만 이렇게 늙어서…
뻔뻔한 눈물만 흘렸다.
그날 윤정이의 추모제는 외민동이 주최했다.
외민동이 있다는 건 1년 전에 학보사 동우회에서 들어 알았지만, ‘그런가 보다’ 했다.
나랑은 별로 상관없는 모임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모임이 윤정이를 챙겨주고 있었다.
선배인 나도 못 챙기고 있었는데…
그날 밤 나는 외민동에 가입했다.
그녀의 자리를 지키는 사람들, 외민동
네 번째로 모란공원에 간 건, 외민동 회원이 되어서다.
‘모란공원 민주열사 묘역 정비 활동’이었다.
생각해 보니, 작년 11월에 윤정이 묘가 잘 유지되고 있었던 건 누군가가 돌봤기 때문일 텐데, 그땐 그런 생각을 못했던 거다. 누군가는 묘역을 정비하고 있을 거라는 생각.
이번 정비 활동에 내가 속한 조에는 윤정이 묘가 포함되지 않았다.
그러나 걱정되진 않았다.
내가 윤정이를 생각하며 비석과 현판을 닦는 것처럼,
다른 분들도 윤정이 비석을 닦고 잡초를 뽑아낼 테니까.
우린 모두 민주열사의 선배며 후배인 셈이니까….
정비활동을 끝내고 외민동 사람들과 함께 윤정이를 보러 갔다.
31살의 윤정이는 50살의 나를 보고 웃는다.
나는 생각한다.
50살의 나 잘 살고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