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외교학과 86학번
지난 10월 1일 아침, 인천에서 세 분의 선배들과 함께 동두천의 소요산 입구에 있는 성병관리소 철거에 반대하는 평화문화제에 다녀왔다. 대표적인 미군부대로 기억하는 동두천은 초행길이었다. 기껏해야 대학시절 김명인의 시집 동두천을 읽으며, 미군부대와 기지촌을 떠올리고, 잇따르는 미군범죄의 현장 동두천에서 1992년에 일어났던 윤금이 사건을 기억했다. 80년대 후반에도 동두천에서 일어난 끔찍한 미군범죄 소식에 크게 격앙되어 집회를 했던 기억이 있는데, 그때 그 사건의 희생자가 누구였는지 인터넷을 찾아보아도 찾을 수 없다.
소요산 성병관리소 현장에 도착하기 전 시간이 남아서 과거의 기지촌 흔적이 남아 있는 보산역 주변 동두천외국인관광특구 일대를 둘러보았다. 한때는 미군들로 흥성거렸을 거리는 퇴락한 채 거의 모든 상점들이 문을 닫은 상태였고 인적도 드물었다. 관광특구 골목을 지나다 문을 닫은 사진관 앞에 발을 멈췄다. 가게를 “임대”한다는 유리문에 붙인 안내문 바로 아래 흑인 미군병사와 함께 찍은 한 가족의 사진이 전시물처럼 남아 있다. 저 가족들은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궁금했다. 1979년에 나온 김명인의 시집 동두천에 등장하는 어머니로부터 버림받은 혼혈아의 슬픈 갈망처럼, 환하게 웃고 있는 네 가족은 지금 “돈 많은 나라 아메리카”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을까? 동두천을 포함하여 미군부대가 진주했던 도시들에는 이처럼 미군들이 남긴 삶의 흔적들이 짙은 인연으로 남아있다.
2013년 평택미군기지가 완공되면서 용산에 있는 미군 핵심 지휘부와 한강 이북의 미 제2사단 예하부대가 차례로 평택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2000년대 초반 이라크 파병과 주축 부대의 평택 이전으로 동두천 주둔 미군이 크게 감소하면서 동두천은 새로운 변화를 맞고 있다. 위축된 지역경제를 살리기 위한 방편으로 동두천시는 국고지원 등을 통한 지역개발에 박차를 가하면서, 미군들을 위한 위안부들의 성병을 관리했던 소요산 성병관리소를 부끄러운 과거라고 철거하고 그 위에 소요산 관광센터를 지으려 하고 있다.
그러나 이를 지키려고 나선 사람들이 있다. 소요산을 오르는 등산로 바로 옆에 조성된 주차장 옆 숲속에 철망으로 통제된 성병관리소라는 건물이 남아 있다. 인천에서 올라간 우리 일행들은 이 건물의 철거를 저기하기 위한 평화문화제에 참석하기 위해 도착했는데, 이미 동두천의 시민들을 비롯하여 인근 여러 도시에서 많은 시민들이 와 있었다. 동두천 성병관리소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언론을 통해 널리 소개되었다. 2015년 SBS의 ‘그것이 알고 싶다’를 통해 최초로 방송되었는데, 방송 내용은 그야말로 충격적이었다. 성병관리소는 미군’위안부’라 불리었던 여성들을 성병관리라는 명목으로 강압적으로 감금했던 곳이다. 쇠창살 속의 한국 여성들이 원숭이 같다하여 미군들에게는 ‘몽키하우스’라고도 불렸던 동두천 옛 성병관리소는 강제적 성병검사에서 탈락한 ‘낙검자’들을 완치 때까지 가둬두던 곳이다.
안김정애 기지촌여성인권연대 공동대표의 조사에 따르면, 성병관리소 주한미군 기지촌의 본격적인 형성은 1957년 7월 경 유엔군사령부가 도쿄에서 서울로 이전할 무렵 정부 부처인 보건사회부, 내무부, 법무부 장관 등 3개 기관장은 ‘유엔군 출입 지정 접객업소 문제 및 특수 직업여성(속칭 위안부)들의 일정 지역에로의 집결문제’에 관하여 논의를 갖고 위안부들을 일정 지역으로 집결시키기로 합의하였다. 이에 따라 한국 정부는 유엔군 주둔지를 중심으로 서울에 접객업소 10개소, 인천에 댄스홀 12개소, 부산에 댄스홀 2개소 등을 미군 위안시설로 지정하고, 미군과 한국 정부가 공동으로 성병 대책위원회를 조직하여, 이들 시설에서 일하는 여성들에 대한 성병을 조직적으로 관리하기로 하였다.
정부는 1969년부터 ’기지촌 정화운동‘을 추진하여, 1971년 12월 22일, 기지촌정화위원회를 발족하고, 1972년 2월에 박정희 대통령이 사인이 들어간 ’기지촌 종합대책‘을 발표하였다. 기지촌 정화운동 중 ’성병관리정책‘은 성병교육과 의무적인 성병 검사, 엄격한 접촉확인 체계의 제정과 강화로 구성되었다.(안김정애, 「동두천 옛 성병관리소를 말하다」, <프레시안>, 2024. 9. 29)
동두천 성병관리소는 바로 이러한 관리정책 아래 1973년 세워졌다. 부지면적 6천766㎡에 2층짜리 건물로 지어진 동두천 성병관리소에는 방 7개에 140명까지 수용이 가능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일본군이 강제로 동원, 관리한 위안부 문제가 한일간 역사의 쟁점으로 떠오른 터에, 한국정부에서 미군을 위한 위안부를 공식적으로 운용, 관리했고, 이들의 성병을 관리하기 위해 전국적으로 미군 주둔지역에 40개의 성병관리소를 1970년대에 설치했다는 사실 자체가 충격이었다. 이곳에 강제 수용된 여성들은 기준치 10배 이상의 페니실린을 맞으며 고통을 당했다. 대법원은 지난 2022년 9월, 국가의 불법성과 반인도적 범죄행위를 인정하고 피해자 여성들에 대한 손해배상을 선고한 바 있다. 그런데 동두천시는 이 역사적인 여성인권이 유린된 장소를 지워버리려는 행정의 폭거를 진행하고 있고 국가는 짐짓 자기 일이 아닌체하며 방관하고 있는 것이다.
박정희 정권은 기지촌 반경 2㎞ 이내에서 성매매를 허용하고 성병관리소까지 운영하면서 주한미군을 위해 사실상 국가에서 성매매를 조장해왔던 역사를 우리는 지우고 잊어야 하는가? 동두천을 비롯한 경기도 미군 주둔지역에 존재하던 성병관리소 6곳은 1990년대 이후 운영이 중단됐다고 한다. 1973년부터 23년 동안 매년 여성 수천 명이 이곳을 거쳐 갔고, 전국에 40곳 넘었던 성병관리소가 있었으나 동두천을 제외하고 지금 그때 그 장소, 여성들의 인권이 돈벌이 수단으로 이용되고 처참하게 관리되었던 국가폭력의 흔적은 사라지고 없다. 이제 동두천 성병관리소마저 철거돼 사라지도록 방치해야 하는가? 드디어 노벨문학상 수상작가를 보유했다고 자랑스러워하는 대한민국의 이 이율배반을 어찌할 것인가? 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는 동두천 성병관리소는 지금 우리에게 묵묵한 목소리로 말을 건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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