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트럭커로 살아가는 윤기영 동문(태국어 87)-
편집자, 신방과 85학번
윤기영 동문은 한국외국어대학교 태국어과를 졸업한 후, 다양한 경험을 거쳐 현재는 미국에서 트럭커로 생활하고 있다. 가족과 교육, 사회적 가치 실현에 대한 그의 고민과 도전은 외민동 동문들과 크게 다를 바 없다.
“대학 시절, 저는 PD 계열이었어요. 태국어과 자체가 PD 성향이 강한 학과였거든요. 그래서 NL 계열의 대부였던 칠성이 형을 피해 다니느라 바빴어요. 총학생회장 선거 때도 도와달라는 요청이 있었지만, 저는 PD 계열 후보였던 수한이 형을 도왔죠. 이후에도 총학생회에서 활동해보라는 권유가 있었지만, 그냥 도망쳤어요.”
윤기영 동문에게 함칠성 동문은 특별한 존재였다. 두 사람은 같은 고등학교 출신으로, 그가 학창 시절 한 선생님으로부터 들었던 이야기가 아직도 생생하다.
“선생님께서 ‘내가 살면서 한 학생 때문에 보안대도 가보고 경찰이 집에도 찾아왔다. 너희는 절대 데모하지 마라’라고 하셨어요. 그 학생이 바로 함칠성이었죠.”
대학 시절 NL과 PD라는 이념적 구분 속에서 깊이 관여하지 못했지만, 군대를 다녀온 후에는 오히려 이러한 이념을 넘어서 가까운 관계가 되었다.
일곱 명의 자녀, 그리고 교육을 위한 미국 이민**
윤기영 동문에게는 무려 일곱 명의 자녀가 있다. 남들이 보면 많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에게는 사회 변혁 운동의 일환이었다.
“대학을 졸업한 후 변하는 사람들이 많잖아요? 평생 학생 때처럼 깨어 사는 게 쉽지 않죠. 그래서 저는 아내와 함께 아이들을 잘 키우는 것이 제가 변하지 않고 갈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렇게 하다 보니 아이들이 일곱이나 됐네요.”
그가 미국으로 이민을 선택한 것도 자녀 교육 때문이었다. 태국과 베트남 등지에서 거주하며 미국 출장을 자주 다녔는데, 우연히 방문한 샌디에이고에서 미국 이민을 진지하게 고민하게 되었다.
“한국 공교육에 대한 비관적인 생각이 있었어요. 일곱 명의 아이를 사교육 없이 키운다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죠. 그리고 성적만으로 아이들을 평가하는 경쟁적인 분위기도 싫었어요. 그래서 반미주의자였던 제가 미국 이민을 선택하게 된 거죠.”
기대 없이 출장길에 영주권을 신청했는데, 1년 반 후에 영주권이 나오면서 무작정 미국으로 이주했다. 이민 후에는 많은 어려움이 따랐지만, 아이들 교육에 있어서는 후회가 없었다. 미국의 공립학교 시스템 덕분에 사교육 없이도 평등한 교육을 받을 수 있었고, 현재 다섯 명이 대학에 재학 중이며 큰아이는 호주에서 일하고 있다.
“미국에서 유학하면 학비가 8만~9만 불이지만, 영주권이 있는 아이들은 거의 공짜로 다닐 수 있어요. 장학제도가 잘 되어 있거든요.”
그는 자녀들이 독립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교육시키는 것이 부모로서의 중요한 역할이라고 강조했다.
“아이들이 부모에게 너무 의존하는 건 좋지 않아요. 부모가 계속 옆에 있으면 아이들도 독립할 기회를 놓쳐요. 20~30대가 되어서도 부모에게 의지하는 사람들을 많이 봤는데, 결국 부모의 책임이 크다고 생각해요. 도와줄 부분은 도와주겠지만, 아이들이 스스로 서는 법을 배워야 해요.”
막내까지 대학에 진학하면 그는 아내와 함께 한국으로 돌아가 자신들의 새로운 삶을 시작할 계획이다.
12시간 넘게 운전하는 트럭커, 가족의 꿈을 지켜낸 시간들
미국으로 이민을 갔을 때 윤기영 동문은 경제적으로도, 문화적으로도 새로운 도전에 직면했다. 한국에서 사업을 하며 베트남과 태국에서 경험을 쌓았던 그였지만, 미국에서는 전혀 다른 현실이 기다리고 있었다.
“처음 미국에 왔을 때는 정말 막막했어요. 한국에서는 사업도 했고, 사람들과의 네트워크도 있었지만, 미국에서는 그게 전혀 통하지 않았어요. 영어 실력도 부족했고, 미국에서 일할 수 있는 경력도 없었죠.”
기존에 하던 물류 사업을 미국에서 이어가려고 했지만, 시차 문제와 현지 네트워크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결국 그는 트럭 운전을 선택했다.
“솔직히 내가 트럭을 몰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하지만 미국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었어요. 돈을 벌어야 했고, 트럭 운전이 비교적 빨리 시작할 수 있는 일이었죠.”
그는 하루 12~14시간씩 트럭을 몰며 미국 생활을 버텨냈다. 장거리 운송을 하며 매주 1만 킬로미터를 운전해야 했고, 가족과 떨어져 지내는 시간이 많았다.
“샌디에이고에서 뉴욕까지 왕복하는 데 5일이 걸렸어요. 하루 12시간 넘게 운전하는 생활이 반복됐죠.”
가장 힘든 순간이었지만, 그는 그 과정을 통해 중요한 교훈을 얻었다.
“내가 지금까지 해온 일이 아무리 커도, 결국 새로운 환경에서는 다시 시작해야 하는 순간이 오더라고요. 그때 겸손하게 배우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어요.”
현재 그는 5년 넘게 트럭 운전을 하면서 가족을 부양했고, 이제는 근거리 운송으로 업무를 조정하며 좀 더 안정적인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사회적 가치 실현을 향한 열망, 외민동이 있어 가능합니다
미국 생활을 하면서도 그가 가장 힘들어했던 것은 고향에 계신 부모님과 친구들을 보지 못하는 것이었다. 특히, 최근 한국의 사회적 이슈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못하는 것이 아쉬웠다.
“미국으로 이민 온 분들은 연세가 많은 편이라 정치적 성향이 보수적이에요. 얼마 전에 교회 목사님이 윤석열을 지지하는 발언을 해서 교회를 옮겼어요. 이런 분위기 속에서 한국에서 집회에 나가는 동문들을 보며 함께하지 못하는 것이 가장 아쉬워요.”
그는 외민동 활동을 지켜보며, 변하지 않는 가치와 신념을 지켜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점에서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사회가 변하고, 사람들도 변한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한결같이 신념을 지키며 살아가는 분들이 많더라고요. 이런 분들이 있기에 세상이 완전히 나쁜 쪽으로만 가지 않는구나 싶었어요.”
그는 한국으로 돌아가면 외민동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싶다고 밝혔다.
“단순히 정권이 바뀌고 안 바뀌고를 떠나서, 어려운 사람들을 돕고 사회적으로 꼭 필요한 활동들을 계속 이어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저도 한국에 돌아가면 그런 일에 작은 힘이나마 보태고 싶어요.”
그는 고향 춘천에서 텃밭을 일구며 여유로운 삶을 살 계획이다. 그러나 그 삶 속에서도 그는 여전히 사회적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작은 노력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윤기영 동문과 만날 날이 무척이나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