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훈한 동문탐방

-장흥 문충선 동문과 함께-

석대뜰 그날의 함성과 한발 한발 유무상자를 위하여

Picture of 김경은

김경은

포르투갈어과 84학번

 여명에 집을 나서 총총히 약속 장소에 도착하는 한 점 에너지들이 있었다. 서울을 빠져나오는 일이 일대 퀘스트였다. 스무 명 넘는 인원은 순조롭게 서울역과 양재, 죽전에서 탑승 완료했고, 심지어 계획보다 오 분 앞선 6시 55분에 출발했다. 또 다른 스무 명 남짓은 승용차를 이용해 서울서, 충주와 광주에서, 전주, 순창에서 속속 합류했다. 작전을 수행하듯 어디쯤 왔는지 줄기찬 점검이 이어졌다. 개개인의 에너지가 한 곳으로 모이는 열기를 한 점 불빛으로 찍어 한 폭 그림에 담는 상상을 해보라. 곳곳에서 깜박거리며 달려와 보태고 보태는 광경과, 위치를 묻고 응답하는 그물망은 굉장한 에너지를 내뿜었을 테다.

한 점 불빛들의 에너지

<장흥, 문충선 동문과 함께>하는 탐방은 대규모 인원이 길이길이 권태롭지 않을 방법을 확인한 자리였다. 장흥에는 동학농민전쟁의 최후 격전지가 있었다. 또 독립운동으로 빨치산으로 면면히 이어져 당시를 기억하는 증언자와 기록되지 않은 역사를 전달받은 후손들이 있었다. 한국외국어대학교 민주동문회는 그 발자취를 따라가는 여정을 2024년 8월 11일, 12일 이틀 동안 진행했다.

 그동안 외민동은 ‘소소한 동문 탐방’을 산발적으로 벌여왔고 외세와 독재에 대항한 역사항쟁의 추모식에 정기적으로 참여했다. 열 명 내외 인원이 동문의 작업장이나 거주지를 방문하는 ‘소소한 동문 탐방’과 4.3 제주항쟁이나 5.18 광주민주화운동 기념식에 참가하는 스케일 있는 동문 행사가 결합하여 확대된 것이 이번 동문 탐방이었다. 탐방은 여러 마리 토끼를 포획하며 조직력과 개인의 열정, 후원, 의미와 재미가 ‘심신과 물’(心身物)이라는 여러 차원에서 조화로웠지만 한 귀퉁이가 다소 씰그러진 육각형 프로그램이었다. 씰그러진 이유는 뒤에 가면 밝혀질 것이다.

 다섯 시간, 그 이상을 달려온 사람들은 장흥군청 앞 국밥집에서 우선 허기진 배부터 채웠다. 깔끔하고 시원한 콩나물국밥을 먹고 나오니 기시감이 들지 뭐겠나. 군청 정문에서 보이는 천관산, 그 산으로 달려가는 도로, 도로 양옆의 낮은 건물들과 푸른 논밭. 이십 년도 더 전에 이청준 선생과 함께 작가의 생가가 있는 장흥으로 문학기행을 온 적 있었다. 어쩜 그리도 변하지 않았는지 천하의 길치도 알아본 군청 앞길이었다. 이곳은 또 다른 작가 한승원, 이승우의 고향이란 사실도 그때 알았으며, 그래서였나? 지세가 예사롭지 않아 보이던 기억이 또렷하다.

 변한 것은 오히려 사람이었다. 버스 안에서 얼굴을 익혔다고 낯익은 사람들과 아직은 낯선 사람들 속에서 문득 겹치는 옛 얼굴이 있었다. 왠지 등에 ‘호남향우회’란 글귀를 새겼을 것 같은 빨간색 티를 걸친 남정네. 아니, 이런! 너, 정재원? 반갑게 인사하고 보니, 길은 알아보면서 몇 년을 함께했던 후배를 잠시나마 닭 보듯 한 것 아닌가. 지금은 광주에서 살고 있단다. 동문회라는 울타리 안이어서 더듬어가던 정신이 기억을 낚아 올렸지, 만약 밖에서 만났다면 어림없었을 상황이다. 그렇게 흐트러진 기억으로 시작된 나의 동문회 체험, 동문 탐방 첫날이었다. 어느 순간인가 삼십 년을 훌쩍 뛰어넘었고 이런저런 어색함도 차츰 옅어졌다.

그들의 흔적을 발굴하고 발굴하며

 일행은 다시 차에 올라 교촌 천도교당으로 이동했다. 교당을 지키는 분들이 향기로운 차와 정갈한 간식을 차려두고 우리를 맞았다. 외세에 대항하다 희생된 농민군과 선열을 향한 묵념을 올린 뒤, 일행은 문충선 선배의 기조 강의에 귀를 모았다. 흔히 공주 우금치를 동학농민군 최후 격전지로 알고들 있지만 최후 전투는 석대들에서 벌어졌다. 외세에 쫓겨 땅끝마을까지 몰린 농민군은 석대들에서 총궐기한다. 발음하는 사람에 따라 석대뜰이라고도 하는 이곳에 모인 동학농민군은 마지막 화력을 태웠다. 김학삼 접주는 석대들 전투 후 장흥 벽사역으로 끌려가 모진 고문 끝에 화형당한다. 그의 시신을 수습해간 이는 혁명동지이자 반려이던 여성이었다. “치마폭에 이고지고 삼십 리 길을 걸어 시신을 안장했다”는 그녀의 심정이 어땠을지. 신분철폐와 남녀평등을 주장하며 싸웠고 체포됐으며 처형당한 여성농민군 이소사 이야기도 눈길을 끌었다. 이방언, 이사경, 이인환 대접주와 달리 전투 후 홀연히 사라져 생전 흔적을 전할 수 없는 웅치접주 구교철은 구술 기록을 작업한 ‘장흥문화공작소’ 인원들에게 특히 아픈 손가락이었다. 농민군은 절대적 열세의 무기로 싸우다 일본군에게 전멸당했다. 사실상 예정된 결과였다.

소년 뱃사공의 평생 속셈과 기억할 역사

여기까지가 그나마 세상에 알려진 사건이었다면 다음으로 이어지는 서사는 꽁꽁 가려져 피지배층의 힘을 확인시켜준 쾌거이며 전복의 순간이었다. 용산면에는 소년 뱃사공 윤성도가 살고 있었다. 소년이라고 했지만 당시 17세면 청년이고 어엿한 성인이었다. 소년 뱃사공은 6백여 명이나 되는 농민군을 인근 섬으로 나눠 탈출시켰다. 그의 고투와 섬사람들의 마음 씀씀이는, 이후 단 한 명의 희생자 없이 후대를 이어갈 수 있었다는 사실에서 빛난다. 일삼아 바다낚시를 즐기던 사공의 평생 취미를 그의 손주는 철이 들고야 이해했단다. 농민군의 행적을 염탐 오는 이들을 피하려는 평생 속셈이었음을. 선배는 동학농민 정신을 ‘유무상자(有無相資, 가진 자와 못 가진 자가 서로 나누는 세상)’라는 말로 정리했다.

 한국의 반봉건, 반외세, 반독재 역사는 따로 끊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동학농민군, 독립운동가, 빨치산 투쟁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동학농민군에서 이어지는 이곳 투쟁의 역사는 말해준다. 유재성, 유재만 형제의 독립운동과 해방 후 자치운동, 한국전쟁 발발과 함께 희생된 보도연맹사건 등은 낯익으면서 안타까운, 한국 근대사를 되새기는 시간이었다. 또, 몇 번이 됐든 반복하면서 기억해야 할 역사였다.

이를 실현이라도 하듯 일행은 출발 전 <장흥 역사기행 자료집>을 읽으며 사전 학습을 했고 차 안 퀴즈쇼 한마당으로 한 번 더 새겼다. 능숙한 입담과 열정으로 정사인 듯 야사로 역사를 숙성시켜준 여세현 일타강사의 차 안 강연도 좋았다. 그가 들려준 초대 교주 최제우와 2대 교주 최시형의 일대기는 민간에 전해지며 살아남아야 할 적층문학이었다. 민중은 그런 식으로 이야기를 기억하고 메아리로 전하며 민담을 꽃피운다.

 귀를 채웠으니 장흥동학농민기념관으로 이동해 눈으로 체험할 차례였다. 기념관에 들어서자 단단하고 결연하게 때로는 다정하고 부드럽게, 다양한 표정으로 살아 움직이는 동학농민군이 관람객을 맞았다. 무명의 얼굴들에 인격을 부여한 박홍규 판화가의 열정과 노고가 빚어낸 광경이었다. 기념관은 격전지였던 석대들에 굳건히 서서 그날의 함성을 증언하고 있었다. 벌판을 둘러싼 억불산과 그 앞을 휘감아 도는 탐진강이 있어, 사정을 모르고 보면 더할 나위 없이 풍요롭고 안온한 풍경으로 비쳤을 것이다.

 물과 흙에 스민 혁명의 기운을 느끼며 일행은 무연고 농민군들의 무덤으로 이동했다. 대규모 인원이 ‘동학농민군’ 탐방이라는 주제로 장흥을 방문하는 만큼, 군수와 지역의원들은 일행의 위령제에 동석해주었다. 이날의 일정은 이로써 정점을 찍었지만 우리에게는 마저 피울 꽃이 아직 남아 있었다.

백자와 다 함께 차차차

 백자의 콘서트! 그렇다. 한국에 K-POP 아이돌이 있다면 외민동에는 민중가수 백자가 있었다. 그는 용광로 불길을 품고 다니는 열 뭉치였고 오늘 남은 우리의 에너지를 불사르게 할 활성탄이요 불쏘시개였다. 산장 측과 콘서트 장소를 협의하느라 실내니 야외니 서로 불통한 혼선도 콘서트 열기를 꺾지는 못했다. 산장과 무대를 왕복하며 비탈길을 오르내린 시간엔 땀을 쏟으며 위장을 비워냈고 모기에 뜯기느라 목젖까지 차오른 욕지거리는 백자의 ‘문화선동’이 다 녹여버렸다. 콘서트는 영원한 운동권의 애창곡 한마당이었고, 흥을 못 이긴 나머지 모 (경석) 동문은 살포시 걸어 나와 오만 원권을 마이크에 꽂고 듀엣을 시도했다. 이로써 우리의 아이돌 백자의 기타연주를 오브리밴드로 몰아넣었지만 줄줄이 이어지는 모방행위는 응징당했다. 콘서트 속의 코너가 마련되었고 외민동이 낳은 전설의 싱어송라이터 김종호와의 콜라보가 한층 흥을 돋웠다. 결국엔 다 함께 열창으로 이어져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가면서 대단원으로 달려갔다.

 일행은 굳세게 술자리를 지킬 수호파와 휴식을 꾀할 정리파로 자연스럽게 나뉘었다. 조인영 선배가 인쇄해온 그림 아래 재활용품들이 속속 정리되었다. 이 시간은 현상윤 대선배의 솔선수범이 단연 빛난 시간이기도 했다. 과연 <걸어서 세계 속으로>를 제작한 PD답게 야전에서 단련한 실력을 발휘하며 후배들을 감동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길었던 하루가 급속히 저무는 순간이었다.

그 어른이 오직하면 그랬겄어

 이튿날은 어르신들을 찾아뵙고 말씀을 듣는 시간이 있었다. 고영찬 어르신은 당시의 이야기를 풀어놓으셨다. 결혼하고 징병을 피해 황해도로 피신한 어르신은 해방 후 2년이 지나서야 귀환한다. 해방공간에서 열기 넘치던 청년들은 또래이던 어르신을 가만두지 않았다.

“안 나오면 좋지 못할 거이라고, 그래가지고 갖제.”

그렇게 노동당원으로 가입한 뒤 전쟁이 터졌고 어르신은 그해 9월, 부용산에 입산한다. 그리고 1년 반을 넘게 빨치산으로 이산 저산 돌던 어르신은 자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 집 짚뭉치서 사흘 동안 있다가 기색을 알고 조부님이 짚등 속 옆으로 오셔서 야아 느그 방(안사람에게) 좀 가봐라.”

96세의 연세에도 또렷한 정신으로 담담히 구술하던 어르신이 울컥하며 멈춘 대목에서는 다들 숨을 죽여야 했다.

“그 어른이 오직하면 그런 말씀 했겄어.”

거대한 역사의 수레바퀴가 개인에게 끼치는 영향이 어땠을지 실감하면서도 짓누르는 무게의 정도를 가늠할 길은 없었다. 칠십여 년 전 일이건만 해소되지 못한 응어리, 개인을 압도하는 거대서사의 비극…….

막걸리 친구로 선배와 우정을 쌓은 어르신은 어느 날인가, 침묵을 깨고 말꼬를 텄다. 장흥독립운동사의 중요 인물인 유재성의 최후도 어른의 증언에서 나왔다. 어르신 같은 패배자들의 목소리를 기억하고 기록하는 작업은 주류 역사가 주도하는 기우뚱한 과거를 균형 잡아주는 요소다(폴 톰슨, ‘구술사, 기억으로 쓰는 역사’, 윤택림 편역, 아르케).

씰그러진 육각형 탐방

 1박 2일의 여정이 마무리되며 일행은 서울로 향했다. 그렇게 막을 내릴 줄 알았던 탐방과 단톡방은 끝나지 않는 노래로 오래오래 뜨거웠다. 주인 찾는 물건이 올라와 임자와 작대기가 그어지나 했더니 정산 안 된 수저세트 값을 치르라는 김복남 선배의 추격전이 펼쳐졌고 한 벌, 두 벌 세트의 숫자에 따라 금액이 달라지는 신기하고 이상한 계산법은 덤앤더머 듀오를 탄생시켰다. 이번 탐방의 ‘옥에 티’는 단연 넉넉한 음식이었으니, 제로웨이스트 실현의 걸림돌이었고 후원한 동문들께는 대단히 죄송한 일이었다. 세세한 정산으로 처절한 반성을 요구한 김복남 선배는 누가 뭐래도 이번 탐방의 일등공신이었고 씰그러진 육각형을 복구할 동력이었다. 유무상자를 실현하는 임원들과 열성 구성원들의 성의가 빛난 탐방, 그 자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