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시 : 2024년 7월 6일
장 소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김영근 동문의 숲과 오두막
참석자 :
선배님들 _ 우영제(72), 윤철수(72), 신홍민(75), 김영근(76), 양철준(76), 이성현(77),
엄태경(77), 이병호(78), 김창기(78), 조인영(78), 최찬규(79), 이용관(80), 김종찬(80),
문양수(80), 남기창(81), 박성구(81), 김양래(82), 유영초(82), 권진열(82), 이태관(82),
김영수(82) 총 21명
후배들, 가족 _ 김복남(83), 이경우(83), 이중원(83), 남일(84), 강민신(85) 가족3명-이
세인, 체로, 마로, 여세현(85), 이수진(85), 함칠성(85), 윤설현(86), 이경석(88), 정석원
(89), 양봉렬(90), 최재직(95), 유복재(96), 김기중(97), 김민석(97) 총 19명
먼길을 가는 이는 물을 만나기 마련이다. 강 앞에 선 이는 건널 도리를 찾건만 쉬이 보일 리 만무하다. 그럴 때 그는 뒤를 돌아보면 된다, 내가 건너온 냇물과 네가 건너온 개천, 그것들을 어찌 건넜는지. 내가 건넌 냇물과 네가 건넌 개천은 나와 네가 만나니 우리가 된다. 하나의 나는 나이지만 또 다른 내가 함께이면 우리인 것이다.
그렇게 다시 우리가 되어 만났다.
선배들이 그리고 후배들이 결국은 역사라는 크고도 같은 강을 건넜기에 2024년 7월 6일, 먼저 건넌 선배들과 다음 건넌 후배들이 만났다.
흐린 아침을 맞고 집을 나섰지만 마음은 맑았다. 목적지 수색은 가깝지 않았다. 평탄한 길을 가다가 마저 평탄함을 허락지 않은 뒤끝 있는 마무릿길을 넘자 언덕이 보였다. 잠깐 전의 도시는 사라지고 숲속 운무가 깔린 언덕 자락에 집이 보였다.
사람이 보였다. 영근 선배님.
처음 보는 이이지만 설지가 않다. 오랜만에 만난 것처럼 인사를 나눈다. 이곳은 영근 선배님의 숲이자 오두막이 자리 잡은 곳이다. 마치 우리를 위해 존재해 온 것 마냥, 영근 선배님이 가꾸어온 이곳은, 때마침 내린 비가 데리고 온 운무로 차분하게 단장하고 있었다. 마치 ‘오늘 오는 너희들 모두를 감싸주고 그간의 노고를 다독여 주겠다.’는 듯이.
조용한 숲속. 내린 비가 고여 한쪽 웅덩이는 못이 되었다. 고목과 안개에 둘러 싸인 전설 속의 숲 같던 이곳에 사람들이 온다. 밀려온다. 서로는 서로를 알아보고 반가워한다. 모르는 이들도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금세 아는 사람이 되어버린다. 우리는 본디 한 샘에서 나왔으니 곧바로 섞여도 여전히 맑기는 같다.
누구는 마지막 남은 길을 못 찾는 이를 위해 차를 몰고 다시 나가고 어떤 이는 상을 치우고 모자란 상을 덧대 자리를 넓히고 의자를 맞추어 앉을 곳을 마련한다. 식기와 수젓가락을 올려 배열한다. 가져온 음식을 나누고 접시에 올리고, 이 많은 일들이 엉킴도 없이 절로 돌아간다. 누구도 시키는 이는 없고 누구도 안 하는 이는 없다. 보이지 않는 손이 있다면 진정 이것일 것이다. 나는 궁금했다. 어인 일인지.
‘그래, 우리는 시켜서 한 이들이 아니었던 것이다. 함께 가고 싶어 했고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바를 스스로 해온 사람들.’
마침 내린 비로 젖은 장작은 큰 솥을 한가득 채운 닭과 물을 감당할 만큼 제 힘을 내지 못한다. 그래도 걱정은 없다, 우리는 더 작은 불씨로 태산도 태웠던 사람들이니까. 철망 위에 오른 고기는 연기로 애를 먹이지만 결국은 순응하고 순순히 맛있게 익을 것이다, 그 시절 마신 최루탄 연기보다 더 독할 리 없으니 우리를 이길 순 없는 것이다.
술이 몇 순배 돌고 붉어진 얼굴들에는 회포도 꽃처럼 붉게 오른다. 우리는 마구 떠들었다. 마치 그간 막혔던 물이 결국 둑을 터뜨리고 몰아쳐 가듯이 말은 말 그대로 질풍노도가 되어 오두막 안과 숲속 빈터를 메웠다. 인생과 군대는 말하는 이가 겪은 것이 가장 모질고 험한 것이냐 놀림 받지만 선배들의 잔인했던 그 시절과 후배들의 엄혹했던 시절은 각자 각자가 모두 하나같이 야만의 시간이었고 모질었다. 반가운 마음에 서로에게 얼굴은 웃고 있고 입에서는 그 시절이 즐겁게 또는 우습게 각색되어 철부지 시절 개구리 잡던 재미있는 일처럼 웃음으로 승화된 이야기로 나오지만 우리 모두는 안다, 그 안에 자리한 엄숙함과 진지함이 맺힌 이야기임을, 내면의 숙연함을. 그렇게 앞물이 흘렀고 그 앞물이 뒷물을 이끌었고 뒷물이 앞물을 밀어 우리는 선배이고 후배가 되어 이 자리에 있는 것이다.
한 후배가 옛 시로써 반기는 말을 낭독한다.
눈 덮인 광야를 걸어갈 때에는 踏雪野中去(답설야중거)
그 발걸음을 함부로 어지러이 걷지 마라 不須胡亂行(불수호란행)
오늘 내가 걷는 나의 이 발자국은 今日我行蹟(금일아행적)
뒤따라오는 사람의 이정표가 되리니 遂作後人程(수작후인정)
앞서간 선배들이 바르게 걸어간 길을 다시 새겨주고, 다른 한 후배는 결코 선배들이 후배들에게 자리를 내주고 앉아있게 하지 않겠다고 공갈과 협박을 아우른다. 마구 일을 주고 마구 할 바를 하게 하겠다고 재차 삼차 강요를 한다. 뒤늦게 재취업을 하게 생긴 선배들이 딱하다. 하지만 싫은 내색의 선배는 없다, 왜냐면 올 것이 왔을 뿐이니까. 그렇게 후배는 선배를 놓아주지 않을 것이다.
노래가 흐른다. 모두가 부른다. 어느덧 시간은 되돌아가 그 시절 앳되었던 청년들이 노래를 부르고 있다. 그때의 선배들이, 그때의 내가, 그때의 후배들이 청년이 되어 젊은 날의 뽀얀 얼굴에 홍조를 물들이고 노래를 부른다.
길었던 하루는 내려앉은 해가 마저 지고 숲속엔 어둠이 그 빈자리를 차지한다. 찾아온 어둠처럼 흥은 짙어지고 선배와 후배의 정은 깊어진다. 그간 못 들었던 선배의 이야기를 전해 듣고 ‘그렇게 살고 있구나.’하며 함께 했던 시간을 회상하고 곁에 자리한 선배들의 얘기를 듣고 알지 못했던 일들과 더 깊은 사연을 알게 된다. 하고 싶은 말과 듣고 싶은 이야기는 끝이 없지만 변함없이 하루는 다음 하루에게 자리를 내주기
위해 달아나고 있었다.
불콰해진 선배는 노곤함을 못 이겨 일어나고 갈 길이 먼 선배는 마지못해 일어난 다. 선배는 가기 싫고 후배는 보내기 싫다. 뒷자리를 정리하는 이들의 손은 누구를 탓하지 않고 제 할 일에만 쉼이 없다.
고마웠습니다, 선배님들. 함께 해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선배님들.
앞물이 되어 바다로 끌고 가 주셔서 감사합니다.
엄혹한 시대라는 같은 강을 건너서 여기에 이르렀기에 선배님들의 노고를 짐작이나마 할 수 있는 후배들과, 내가 먼저 건넜던 강이기에 후배들을 애틋하게 여길 수 있는 선배님들과의 공감.
그날 하루는 꿈같이 갔지만 선배와 후배는 언제나 우리가 되어 마침내 마지막 강을 넘을 것이며 바다에 이를 것이다, 후배가 될 우리 아이들이 더 이상 건널 강이 없도록.
터어키어과 89학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