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석자: 영어과 86 김양희, 박정순, 이영심
진행자: 외민동 부회장 겸 홍보위원장 여세현(법학 85)
곁다리: 강민신(서어 85), 라길수(독어 85)
주 제: 80년대 그때 그시절(잊지 못할 사건, 인물, 스토리…)
장 소: 하바나24
일 시: 9월 5일(목) 20시
세현: 영어과 86학번 세 분을 30여년만에 이렇게 만나게 되어 정말 반갑습니다.
(오랜만에 만나서 안부 인사도 나눠야 하고, 묻고 싶은 말도, 하고 싶은 말도 많아서 인터뷰가 제대로 진행되기 어려운 상황. 다시 정신차리고….)
세현: 세 후배는 민주화나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가 무엇이었는지 이야기를 해주면 좋겠네요.
영심: 저희 때 영어과 86 신입생들이 161명이었는데, 입학식을 하기 전 2월에 남이섬으로 갔던 영어과 MT에 대부분의 신입생들과 선배들이 참가했고 그때 서로서로 많이 공감하고 친해졌죠.
대학교수, 영어과 86학번
양희: 그런 분위기가 신입생들이 자연스럽게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가지도록 만들었던 것 같아요. 신입생 중 절반 이상이 학회를 들었거든요.
저는 처음에는 영어과 학회 중 사회과학반을 들려고 했는데, 선배들이 막더라고요. 나중에 들은 말인데, 그 당시 선배들 안에서는 제가 날라리라는 얘기가 있었데요. 학회 룸 출입 금지 얘기도 간접적으로 들었어요. 저를 포함한 몇몇 친구들이 치마 입고, 운동화가 아닌 샌들 신고 다닌다고. 그래서 영어과 학회 중 가장 투쟁성이 떨어지는(?) 편집부를 들어갔어요.
정순: 나는 선배들이 다 자기네 분과로 들어오라고 했는데(하하), 웃자고 한 말이고요. 저는 선배들이 멋있어 보여서 처음부터 따라다녔던 거 같아요. 세상의 모든 고민 다 짊어진 듯 인상 쓰고, 구부정하고 덥수룩한 게 그냥 멋있어 보였어요. 어느날 학회 룸으로 모이라고 해서 갔는데 동영상을 보게 되었어요, 광주민주화운동… 중2 때 어렴풋이 소문으로 떠돌던 것이 생각났고 그 실체를 보게 된 거죠. 충격과 공포, 분노로 말을 할 수가 없었어요.
양희: 입학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하루는 학회원들에게 가투(가두 시위)에 나가라고 하더라고요. 영어과 84 선배가 동을 뜨는 시위였는데, 아무것도 모른 채 선배에 대한 의리만으로 금호동을 나갔어요. 84 선배가 금호동 사거리에서 동을 뜨자마자 잡히고, 저는 다른 84 선배랑 허겁지겁 달려서 버스에 올라탔는데, 사복들이 버스까지 올라왔다가 그냥 내려갔죠. 그때도 제가 치마를 입고 있었기에… 그 84 선배는 제가 구한 거죠~~.
세현: 학창 시절에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이나 인물, 또는 충격적이었던 일화를 얘기해 주세요. 이한열 열사나 박종철 열사, 6.10항쟁 등 큼지막한 일들 말고, 이문동에 국한된 이야기를 해주세요.
정순: 입학식 때 과 선배들이 구호를 외치면서 시위를 했어요. 어깨동무하고 무리 지어 운동장을 도는 모습을 멀리서 봤는데 놀라서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어요.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나중에 들었는데 지금은 기억이 안 나네요.
집수리, 영어과 86학번
영심: 저는 1학년 때 충북 제천의 큰골과 음실로 영어과가 농촌 활동을 갔을 때의 일이 생각나요.
세현: 농활 가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군요.
영심: 농활, 즉, 농촌 봉사 활동이 농민들을 도와서 밭이나 논의 잡초를 제거하는 것과 같은 농사일을 하는 것인데, 정말 너무너무 힘들더라고요. 무더운 날씨에 허리를 제대로 펴지 못하고, 몇 시간씩 쪼그려 앉거나 허리를 숙인 채 풀을 뽑아야 했으니까요. 그런데 신입생들인 우리들의 눈에 2학년 선배들이 일은 제대로 안 하고 게으름을 피우면서 우리들을 들볶기만 하는 느낌이 살짝 들었죠. 그래서 1학년들이 식사 당번을 맡았던 어느 날 아침 우리들은 선배들을 골탕 먹이기 위해 2학년 선배들의 밥에 개구리를 넣었죠. 밥을 먹던 선배들이 기겁한 모습을 보고 통쾌한 감정을 느꼈는데, 결국에는 작업 반장을 맡았던 3학년 선배에게 2학년 선배들과 1학년 다 같이 크게 혼났죠.
정순: 농활도 가고, 추활 가서는 사과도 따고 그랬어요. 87년에는 엄청난 수해를 입었던 서천으로 수활도 갔었죠.
양희: 저는 88년도에 있었던 일들이 기억에 남아요. 제 진로에도 영향을 미쳤던 일들이었거든요. 88년, 89년은 통일 운동의 분위기가 컸었잖아요. 하루는 선배가 아주 무거운 분위기에서 86들을 한두 명씩 불러서 통일선봉대에 나서라고 했어요. 구속될 수도 있다고 하면서요. 그때 여기 있는 정순이가 자원을 했어요.
정순: 88년 8월은 저한테는 너무나 뜨겁고, 눈부신 한 달이었죠. 88학번 후배 김동희, 경제학과 87학번 정원택과 함께 통일선봉대로 뛰었어요. 전남대에서 발대식을 한 후 2주간 뛰고, 걷기도 하고, 때로는 노숙도 하면서 연세대에 도착했는데요, 전국을 돌아서 통일선봉대가 결집한 거죠. 뜨거운 함성을 서울의 밤하늘에 울려 보내는데…. 와, 진짜 생애 가장 가슴 벅찬 순간이었어요.
양희: 정순이가 여러 가지로 힘들었던 시기였기에 함께하지 못해서 오랫동안 미안했어요.
정순: 미안하긴, 나한테는 정말 소중하고 가슴 벅찬 시간이었는걸. 무서워서 아무것도 못 하다가 이제야 겨우 뭔가를 해낸 거 같아서 얼마나 뿌듯했는데~~. ㅎ
양희: 89년 4.19 혁명 기념 교내 시위가 있었던 날, 영어과 88학번 후배가 전경인지 사복인지 던진 돌이 눈에 맞아서 한쪽 눈이 실명되는 안타까운 일이 있었어요. 대책위가 꾸려지고 영어과는 특히 전면 수업 거부에 들어갔죠. 그때 부전공이 교육학이었는데, 2주 뒤에 모교로 교생 실습을 나가야 하는데, 교생 실습 안 나갔죠. 한두 달 뒤에 저만 안 나갔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배신감이 살짝 들기도 했어요. 하지만 그해가 영어과 후배가 2명이나 시위 중 실명을 당해서 힘들면서도 투쟁 의지가 제일 강했던 것 같아요.
길수: 대학에 갓 입학했을 때는 처음 사는 세상이라 모든 게 낯설고 어리숙할 수밖에 없었는데, 지금의 내가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간다면 무엇을 해보고 싶은지?
영심: 저는 연애를 아주 열정적으로 해보고 싶어요. 사실, 대학의 낭만인 미팅도 한번 안 해 봤거든요. 이성에 관심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는데, 결정적인 순간에 나 자신을 내려놓지 못하는 면이 있었던 것 같아요.
정순: 영심이가 연애를 안 했다는 것은 못 믿겠어요. 여자 동기들하고 여행을 갈 때마다 밤새워 영심이의 연애사를 들어야 했으니까요.
영심: 제게, 그 시절의 이성에 대한 관심은 현실적이라기보다는 다소 추상적이고 환상이 많이 가미되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어떤 대상에 대한 관심이 오래 지속되기보다는 쉽게 식는 부분도 있었어요.
양희: 저는 공부요! 그때는 운동하는 사람들 안에서 오히려 수업을 들어가는 것이 안 좋게 여겼어요. 저는 집회가 없을 때는 수업 참석을 충실히 했거든요. 그것 때문에 헌신성이 안 좋다는 말도 많이 들었어요.
정순: 마음 놓고 공부할 수 없는 분위기였으니 노는 건 말해 뭐했을까요? 저는 제대로 놀고 싶어요. 여행은 물론이고 전시회, 음악회 마음껏 다닐 거예요, 기타 치고, 피아노 치며, 노래도 부르고요(그 당시에는 민중가요만 불렀잖아요ㅎㅎ). 영심이처럼 연애도 많이 하고요. 학생운동을 다시 할지도 모르겠지만, 한다면 나를 좀 더 아끼고 나를 좀 더 지켜가며 활동할 거 같아요.
세현: 현재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궁금하네요.
영심: 저는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어요. 대학이라는 공간이 젊음을 상징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물론 변한 점도 많지만, 여전히 대학은 자유로운 토론과 새로운 것을 배우는 것에 대한 열정을 느낄 수 있으니까요. 학생들을 보면서 저 역시 많이 배우는 것 같아요. 저는 아일랜드 출신 작가를 전공했는데, 아일랜드와 우리나라는 정서가 비슷한 점이 많은 것 같아요. 제국주의 국가에게 식민 지배를 받은 경험이 있다는 것과, 술과 노래를 좋아하는 점이 그렇죠. 특히 아일랜드의 대표 술인 기네스 맥주가 유명하죠. 더블린을 여러 번 방문했는데, 런던과 비교했을 때 많이 소박한 느낌이 드는 것도 좋고, 전철을 타고 15분만 가면 바다가 펼쳐지는 것도 정말 좋았어요.
세현: 정순 후배는 인테리어 일을 계속 하는지?
정순: 인테리어가 아니고 집수리랍니다. 예전 같으면 집안에서 아빠가 하던 일들이에요, 등을 교체하고, 수도를 고치고, 망치질을 하는 소소한 일들이죠. 요즘은 망치보다는 전동드릴을 더 많이 쓰지만요.ㅎㅎ 이런 일을 할 줄 아는 아빠들이 많지 않아요, 그래서 비용을 받고 대신 그 일을 해주는 것이 제가 하는 일이에요. 인구는 줄어도, 소소한 수리를 할 줄 모르는 1인 가구가 늘어나니 저는 점점 더 바빠지네요. 이 업을 시작한 지 1년이 넘었는데, 수전도 갈고, 등도 갈면서 땀을 쭉 흘리고 나면 정말 개운해요. 좋아하는 고객들 보며 보람도 크답니다.
양희: 출판사에서 오랫동안 편집 기획자로 일을 했어요. 현재는 프리랜서 편집자로 2025년 개정 교과서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출판기획자, 영어과 86학번
세현: 외민동에 가입하고 느낀 점이나 바라는 점을 얘기해 주세요.
정순: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학교 다닐 때와 너무나 흡사한 분위기가 사실 낯설어요. 외민동에 올라오는 많은 것들을 모두가 실천하기에는 그동안의 간극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기에 천천히 외민동이 함께할 수 있는 것들을 모색했으면 좋겠어요.
양희: 외민동에 가입하고 2주 정도는 조금 힘들었어요. 매일 올라오는 실천 활동으로 매일 집회를 참석하는 것 같고, 참석해야만 할 것 같은 부담감이 있었나 봐요.
정순: 우리가 일상생활에만 몰두하면서 지낸 것은 아니거든요. 진보적인 성향을 고수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고, 촛불집회에도 가족, 친구들과 함께 참가하고 했으니까요.
양희: 지금 외민동은 연령이나 성향, 정치적인 견해 등이 다른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잖아요? 모일 수밖에 없었던 대의를 기반으로 외민동이라는 큰틀에서 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영심: 사회에서 그 어떤 사람도 차별받지 않고, 자신이 노력한 만큼 누리는 그런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외민동과 함께하고자 합니다.
세현: 짧은 시간이었지만 후배들과의 유쾌한 수다로 아주 즐거운 자리였습니다. 자주 봅시다.